태극진경
제목 | 태극도 - 태극진경 1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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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황상제(玉皇上帝)님께서 도력(道曆) 기원전 14(단기 4228, 서기 1895)년 세차 을미(歲次乙未) 음력 12월 초4일, 양력 이듬해(서기 1896년) 1월 19일 경오(庚午)일진 계미(癸未)시에 당시의 조선국 경상도 칠원현 서면 회문리(慶尙道 漆原縣 西面 會文里) 현재의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慶尙南道 咸安郡 漆西面 會山里)에 강세하시니, 성은 조(趙), 본관은 함안(咸安), 어휘는 철제(哲濟), 어자는 정보(定普), 어호는 정산(鼎山)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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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의 신격위는 "태극주 옥황상제(太極主 玉皇上帝)님"이시고, 인격위는 "무극신 대도덕 봉천명 봉신교 태극도주 조성정산상제(无極神 大道德 奉天命 奉神敎 太極道主 趙聖鼎山上帝)님"이시니, 삼계의 최고위이신 "태극도주 옥황 조성상제(太極道主 玉皇 趙聖上帝)님"으로서 구천상제(九天上帝)님과 이도일체(以道一體)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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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문리는 동방의 영산(靈山)인 백두 금강 태백 지리의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다시 낙동정맥(洛東正脈)의 남단 부산(釜山)을 향하여 동으로 기복(起伏) 연면(連綿)한 낙남정맥(洛南正脈)의 중간에서 여항(艅航) 광려(匡廬) 무학(舞鶴)의 여러 명산을 이루고, 그 연맥인 자고산(紫皐山)의 주봉이 동으로 힘차게 뻗은 구릉 끝에 봉소형(鳳巢形)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니라. 그 주위를 우로는 천주(天柱) 작대(爵隊) 무릉(武陵), 좌로는 안국(安國) 대곤(大鵾)의 명산이 둥글게 에워싸고, 인근에 천계(天界) 안기(安基) 신산(新山) 무릉(武陵) 구성(龜城) 유원(柳原) 등의 마을이 있으며, 회문리 앞들 중앙에는 곤천(鵾川: 일명광려천)이 흐르고, 그 건너에는 구미산(龜尾山)이 회문리의 안산(案山)격인 대상형(臺床形)을 이루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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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현화인신(現化人身)하신 부친의 휘는 용모(鏞模), 자는 순필(舜弼), 도호(道號)는 복우도장(復宇道丈)이시니, 도기 전 32년 정축(丁丑 : 단기 4210, 서기 1877)년생이시며 품성이 관후 인자하시고 문장이 뛰어나시니라. 선조로부터 전승한 가풍에 따라 충렬의 정신이 투철하시더니, 을사(乙巳 : 서기 1905)년에 부친이신 취당공(聚堂公)께서 순국하신 후에는 우국충정이 더욱 열렬(熱烈)하셨으나 국운이 비색(否塞)하여 나라 안에서의 구국 활동이 불가능하므로 아우 용의(鏞懿) 용서(鏞瑞)와 함께 중국 만주로 전 가족이 망명하셔서, 김혁(金赫) 이석대(李碩大) 등과 구국운동을 전개하시다가 옥고까지 치르시고, 만년에 귀국하셔서는 정산상제님의 창도사업(創道事業)을 보좌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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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께서는 밀양군 하남면 파서리(巴西里)의 명문 여흥 민씨(驪興閔氏) 휘 중호(仲鎬)의 따님으로서, 도기 전 17년에 복우도장과 혼인하시니 휘는 영명(泳明), 도호(道號)는 숭덕부인(崇德夫人)이시니라. 천성이 활달하시고 혜식(慧識)이 영민(英敏)하시며 체격이 건장하셔서 장부(丈夫)의 기상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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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의 휘는 영규(瑩奎), 자는 태견(泰見), 호는 취당(聚堂)이시니 성정이 순정하시고 재화(才華)가 초절(超絶)하셔서 문장과 서예로 명성을 떨치시니라.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셔서 홍문관 정자(弘文館 正字), 지춘추관 기사관(知春秋館 記事官), 승정원 주서(承政院 注書) 등 관직에 계시며 민영환(閔泳煥) 이상설(李相卨) 이동녕(李東寧) 등과 교유하시더니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의 체결단계에 그 부당함을 극간(極諫) 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시자 심화병으로 환향(還鄕) 후 피를 토하고 서거하시니라. 조모는 의성 김씨(義城金氏)로서 승정원 정자(承政院 注書) 구락(龜洛)의 따님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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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 인신 선조의 연원은 중국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라 하며 28대조 휘 정(鼎), 시호 충장(忠壯)은 고려 개국 벽상공신 대장군 원윤(元尹)이시며, 19대조 휘 열(悅)은 고려말의 공조전서로서 고려가 망하매 함안(咸安)으로 낙향하여 새 왕조의 부름에 불응하시니 이후 후손이 함안에서 세거(世居)하시니라. 17대조 휘 여(旅), 호 어계(漁溪), 시(諡) 정절(貞節)은 단종조 생육신의 한 분이시며, 13대조 휘 방(垹), 호 두암(斗巖)은 임진왜란의 의거, 전공으로 호조 참판에 추증(追贈)되시니라. 11대조 휘 함익(咸益), 호 임계(林溪)는 문장과 덕망이 높으셨으며, 고조부 휘 화식(華植), 호 죽헌(竹軒)은 효행으로 조정에서 내린 정려(旌閭)의 명을 받으시니라. 증조부 휘 성의(性義), 호 벽봉(碧봉)은 도학과 신망으로 향리 사림(士林)의 사표가 되셨으며, 증조모는 진주 강씨(晉州姜氏)시니 상제님 인신의 세계(世系)는 11대조 임계공(林溪公)의 종손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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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우도장께서 숭덕부인과 성혼 3년 후 빙택(聘宅)에 머무르시던 을미(乙未 : 서기 1895)년 정월 초3일 밤 꿈에 천지가 별안간 밝아지더니 천상옥경(天上玉京)에서 오색구름을 탄 한 선관(仙官)이 좌우에 시종을 거느리고 유유히 내려와서 두 분께 경배하며 아뢰기를 "저는 천제(天帝)님의 명을 받들어 진멸 지경의 삼계를 광구(匡救)하기 위하여 이 동토에 인신으로 강세 하고자 하오니 어여삐 받아 주옵소서." 하며 부인의 품에 안기니라. 부인께서 일어나 옆의 부군을 깨우셔서 꿈 이야기를 말씀하시니 도장께서 "나도 이제 그와 같은 꿈을 꾸었으니 이는 필시 태몽이며 천기(天機)에 속한 대몽이라, 하늘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함이 옳으리다." 하시니라. 이때 방안에는 이상한 향기가 가득하고 밖에는 서광이 충천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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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취당공께서는 한양에 계시며 자부의 태기 소식을 고대하시던 차 이날 같은 시각에 꿈을 꾸시니, 뇌성벽력과 함께 천지가 진동하고 불이 이글거리는 쇠기둥(鐵柱)이 사방을 휩쓰는데, 바닷물이 넘쳐 불을 뒤덮어 끄고 암흑천지를 이루더니 이윽고 하늘이 갈라지며 찬란히 솟아난 태양이 자부의 품에 안기니라. 이는 대인을 얻을 가문의 길몽이라 생각하시고 도장 내외에게 서찰을 보내어 이르시기를 "우리 가문에 천명에 따른 경서(慶瑞)가 임하리니, 성(誠)과 경(敬)을 다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 준비를 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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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2삭(朔) 만의 출산에 즈음하여 숭덕부인께서 난산으로 산통이 극심하셔서 3일간이나 신음하시더니, 온 가족의 극진한 조산(助産)과 구호에도 불구하고 기혈(氣血)이 쇠잔(衰殘)하여 심신을 가누지 못함에 이르시니라. 이때 혼몽(昏朦) 중 비몽사몽간에 갑자기 산실(産室)이 밝아지며 옥피리 소리와 함께 천상에서 손에 약탕기를 든 한 선녀가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서 부인께 경배하며 말하기를 "소녀는 천존상제(天尊上帝)님의 명을 받들었사 온 바 지금 탄생하시는 옥동자께서는 천제님의 명에 따라 삼계를 광구하실 진주(眞主)이심을 아뢰옵고 조산하고자 하오니 시름을 놓으시고 이 약을 드시옵소서." 하며 약탕기를 기울여 입에 드리우니라. 부인께서 혼미 중에 받아 마시니 삽시간에 기력이 회복되어 정신이 상쾌하여지고 산통이 진정되며 드디어 옥동자를 순산하시니라. 이윽고 선녀는 하직 인사를 올린 다음, 천상으로 올라가고 산실에는 이상한 향기와 서광이 가득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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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아침에 회문리 일대에는 3일간 계속 내리던 눈이 그치고 심한 안개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더니, 강세하신 미시(未時)에는 일기가 청명하여지니라. 한편 산실 지붕으로부터 흰 무지개가 충천하여 7일간이나 걷히지 않았으며, 다른 곳에는 눈이 쌓였으나 오직 산실 지붕에는 한 점의 눈도 없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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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강세 초부터 기골이 장건하시고 기상이 준수하시더니, 차츰 성장하시매 전신에서 후광(後光)을 발하시고 천중천정(天中天庭)이 광대하시며 일월각(日月角)이 풍륭(豊隆) 하시고 봉안(鳳眼)에 안광이 찬연(燦然)하시며 융준용안(隆準龍眼), 학경귀배(鶴頸龜背)시니라. 배면(背面)에 칠성문(七星紋), 우고(右股)에 3 적자(赤子), 좌고(左股)에 72 적자, 두 족장(足掌)에 각각 3 적자가 완연하시고, 장년 후에는 용수(龍鬚) 용조(龍爪)를 지니셨으며 음성은 우레 같은 용성(龍聲)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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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 후에 밤마다 너무 우시는데 그 울음이 아기 음성 같지 않게 크고 우렁차셨으며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듯 하시니라. 모친께서 달래셔도 그치지 않으시므로 조모와 고모께서 밤을 새워 보살피시더니 삼칠일이 지나서야 울음을 멈추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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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 6개월에 말과 걸음을 익히시고 첫돌에 이미 총명 영특하셔서 보고 듣는 일을 잊지 않으실 뿐 아니라, 사리를 캐어 물으시므로 어른들은 그 응답에 노심하시니라. 또 한 가지를 배우시면 많은 일을 깨달으시니 주위에서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신인출현(神人出現)이라는 찬탄이 자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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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세의 유시부터 한번 옳다고 생각하신 일이나 하고자 하신 일은 반드시 실행에 옮기시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끝마치시며, 호생지덕(好生之德)으로써 곤충 한 마리 풀 한 포기라도 함부로 해하거나 상하게 함이 없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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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6세에 벌써 대인의 풍도(風度)로 심성이 활달, 명석하시며 어떤 일에도 침착, 조밀(稠密)하시니라. 가축을 좋아하셔서 어른들이 그 사육에 등한히 하시면 일일이 참견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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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되시던 신축(辛丑 : 도기 전 8, 단기 4234, 서기 1901)년 봄에 한문 서당에 입학하시니, 천종(天縱)의 재질로 하루에 수행(數行)을 배우시거나 수십 장을 배우셔도 다음날 강독에 막힘이 없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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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가을 어느 날에는 홀로 육갑(六甲)과 월력(月曆)의 구성법을 고안하시고 스스로 그 신이함을 기뻐하시며 이를 훈장에게 말씀하시니, 훈장은 이것이 비록 세간에서 이미 사용되는 역서(曆書)와 같으나 7세 소년으로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창안하심에 감탄하니라. 불과 몇 년 만에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까지 섭렵하시고 홀로 궁리진성(窮理盡性)에 잠심(潛心)하실 뿐, 훈장과는 대응하지 않으시므로 도장께서 다른 서당으로 전학시키거나 다른 훈장으로 바꾸셔도 별 효과가 없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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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덕부인께서는 성격이 준열하실뿐더러 엄격한 가정 규범에 따라 상봉하솔(上奉下率)에 빈틈이 없으신 중에도, 상제님께는 비범하신 재덕(才德)의 탁마(琢磨)를 위하여 엄중한 훈계로 하시되, 상제님의 효성 또한 지극하셔서 모자간에는 항상 화애가 넘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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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우도장댁은 대대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숭상하는 유가(儒家)의 가풍으로써 4대가 함께 사는 화목한 대가족이니라. 상제님께서는 종손이시며 독자이신 귀공자로서 가족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셨으나 평소에 말씀하시기를 "안빈낙도는 처신(處身)의 의방(義方)이요, 검소존절(檢素존節)은 접물(接物)의 요결(要訣)이며, 호의호식(好衣好食)은 망신(亡身)의 천습(賤習)이요, 이기해인(利己害人)은 오명(汚名)의 만행(蠻行)이라. 군자는 오직 의방과 요결을 취함이 마땅하니라." 하시며 솔선 궁행(躬行)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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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에서는 비범하신 언행으로 훈장의 칭송을 받으시고 출중하신 총명으로 학동들의 선망을 얻으셨으나 자랑하지 않으시고 항상 겸양하시니라. 엄동설한에 도보 통학으로 동상에 걸리셔도 인내하시고 말씀하지 않으시므로 아무도 모르되 오직 모친께서만 아시고 치료하여 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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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癸卯 : 도기 전 6, 서기 1903)년 12월 어느 날 서숙에서 독서 중 책상에 의지하여 잠시 잠에 드셨는데, 비몽사몽간에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한 선비가 나타나 공손한 태도로 상제님께 사배를 올리므로 "선비는 누구시뇨?" 하시니 "저는 천제님의 명으로 진인을 알현함이옵나이다." 하니라. 그 후에도 심신이 미령(靡寧)하실 때면 이 선비가 나타나 호위 보좌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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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乙巳 : 서기 1905)년 가을에 취당공께서는 왜의 강압으로 인한 한일 보호조약이 극간(極諫)에도 불구하고 체결됨에 이르자, 그동안 동지들과 도모하시던 구국운동이 민영환의 자결에 따라 수포로 돌아가고, 만회책(挽回策)마저 없음으로 그 통분으로 인한 심화병의 증세가 더욱 악화하여 토혈(吐血)까지 하시니라. 이에 관직을 사임하신 다음, 정포은(鄭圃隱)의 충절을 사모하여 그의 원한이 서린 개성의 선죽교(善竹橋)로 가셔서 토열하시며 자진(自盡)하려 하셨으나, 동지들의 만류로 혈흔(血痕)만 남기시고 백골이라도 선영에 묻히고자 귀향하셔서 본댁에도 들르지 않으시고, 대곤산(大鵾山) 선영하로 직행하셔서 기진하여 혼절(昏絶)하셨다가 깨어나 통곡하시며 다시 자결(自決)하려 하셨으나 역시 시종들의 만류로 이루지 못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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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이 소식에 접하시고 가족들과 함께 선영 하로 달려가시다가 증조모께서 "아들의 죽음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먼저 죽으리라." 하시며 벗 너머 절벽 쪽으로 향하심을 보시고 급히 쫓아가셔서 만류하신 후 함께 집으로 돌아오시니라. 증조모께서는 취당공 12세 때에 남편을 여의고 수절하시면서 어린 아들을 길러 등과사환(登科仕宦) 시키셨으므로 가문의 영화를 기대하셨는데 이와 같은 비보에 접하여 엄준하신 성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진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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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댁으로 돌아오신 취당공의 병환은 인근 명의들의 극진한 치료와 가족들의 정성에도 보람없이 더욱 위중하시니라. 이해 10월 초1일 사(巳)시에 자제들에게 유언하시기를 "내 나이 45에 이제까지 한 가지 사업도 성취함이 없이 국사(國事)조차 실패함으로써 망국유민(亡國遺民)이 되고 또한 노모께 앞서가는 불효가 크도다. 나 죽은 후에라도 너희들은 부디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우국애민(憂國愛民)에 힘써 나의 망국유한(亡國遺恨)을 풀어 주기 바라노라." 하시니라. 이어 상제님께는 따로 유촉(遺囑)하시기를 "내 너의 재질이 영명(英明)하므로 너로 인한 노후의 영화를 보려 하였더니 실로 한이로다. 부디 학문과 도덕을 닦아 선조 정절공(貞節公)과 같이 위국충절(爲國忠節)로 가문을 빛내도록 하라. 또 '남모르는 공부와 남 잘되게 하는 공부'로써 일세의 사표(師表)가 돼라." 하시고 다시 가족들에게 부탁하시기를 "이 아이는 일찍 태몽을 얻은 바와 같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니라. 후일 도덕으로 널리 사람을 구하며 가문을 일으켜 대성하리니 부디 공부를 잘 시키라." 하시고 운명(殞命)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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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조부상에 임하셔서 11세의 소년답지 않게 너무 애통하시는 한편, 또한 증조모께서 다시 자진하지 않으실까 염려하셔서 항상 그 곁을 떠나지 않으시며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이 오직 하늘이 하시는 법도이오니 할머님은 너무 상심하지 마옵소서." 하고 위안하여 드리시니라. 밤에는 치마끈을 손목에 감고 주무시므로 증조모께서도 비통한 표정을 짓거나 슬피 울지 못하시고 도리어 위안하여 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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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상제님께서는 조석상식(朝夕上食)과 삭망제절(朔望諸節) 등에 빠짐없이 참례하셔서 가족들을 감동하게 하시더니 12월 21일에 거행된 장례식에도 법도에 맞게 하시므로, 장지까지 수십 리에 이은 조문객들이 모두 상제님의 비범하신 범절을 칭송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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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丙午 : 도기 전 3, 서기 1906)년 가을 어느 날 상제님께서 집 앞에 있는 감나무의 홍시를 따시려고 높은 가지까지 오르셨다가 밟으신 가지가 부러져서 4, 5길 아래 날카로운 돌이 솟은 곳에 떨어지셨으나 아무 상처도 없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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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10월에 상제님께서 숙부 신산공(晨山公)의 안내로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下林里) 소재 18대조 휘 안(安)의 산소에 참배 하시니라. 이 산소는 정절공의 친산(親山)으로서 정절공께서 묘역 주위를 돌로 쌓아 봉쇄하시고 후손들의 묘역 내 참배를 금하시더니, 그 후에 과연 역내에서 참배한 후손이 변고를 당하는 일이 여러 차례 일어나니라. 이날 상제님께서는 신산공의 만류를 듣지 아니하시고 묘역 내에서 참배하셔도 아무 탈이 없으시니라. 이 소식을 들은 종숙(宗叔)인 용우(鏞禹)가 반신반의하면서 근 40년이 지난 갑신(甲申 :서기 1944)년 추석에 안심하고 참배하였다가 급병이 나서 위독하니라. 상제님께서 문병하시고 "내가 풀어 드리리다." 하시더니 곧 쾌유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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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조부께서 유촉하신 "위국충성(爲國忠誠)과 남모르는 공부"를 항상 염원하시더니 13세 되시던 정미(丁未 : 서기 1907)년부터는 그런 생각으로 학문이 소홀하게 되시니라. 복우도장께서 학문에 전념할 것을 엄히 훈계하시니 말씀드리시기를 "소자 감히 아버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오나 소자의 생각으로는 학문은 도무지 문자 공부에 불과하옵고, 문자는 지난 시대의 성현군자(聖賢君子)나 문장재사(文章才士)들의 생각에 불과하오니 이로써 어찌 할아버님의 유명이신 구국제민(救國濟民)의 큰 뜻을 이루오리까? '공부는 남모르는 공부라야 한다.' 하심을 소자 깨닫지 못하옵다가 이제는 확연한 심증을 얻었사옵기에 앞으로는 남모르는 공부에만 전념하려 하오니 살펴 주옵소서." 하시니라. 도장께서는 겨우 13세의 소년이 너무 뜻밖의 말을 하므로 놀라움과 함께 판단이 쉽지 않아 가부(可否)를 말씀하지 못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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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상제님께서는 대청 건넌방에 경서(經書)와 제가서(諸家書)를 비치하신 다음, 방문을 잠그신 채 바깥출입을 않으시고 공양도 방안에서 하시니라. 도장께서 걱정되셔서 누누이 물으셔도 "전날 말씀드린 대로 '남모르는 공부'를 하는 중이오니 염려하지 마옵소서." 하시는 말씀이 너무 진지하고 근엄하시므로 더는 캐묻지 못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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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우도장께서는 4남매 중 맏이이시고, 그 첫째 아우의 휘는 용의(鏞懿), 자는 은필(殷弼), 호는 서산(曙山)이시며 중방(中房) 어른으로 호칭하고, 막내아우의 휘는 용서(鏞瑞), 자는 윤필(允弼), 호는 신산(晨山)이신데 양동(陽洞) 어른으로 호칭하며, 매씨는 창녕(昌寧) 성태호(成泰浩)에게 출가하시니라. 도장의 천성은 문사(文士)의 풍도이셨으나 두 계씨께서는 성정이 강의(剛毅) 담대하셔서 무사의 기질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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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형제분은 선대로부터 몸에 밴 배일사상(排日思想)으로 왜라면 무조건 혐오하시더니, 이때 마산에서 산본(山本)이란 왜인이 금광업과 고리대금업으로 한인 재산을 착취한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그를 도산(倒産) 시켜 그 자금으로 화약을 제조하여 구국운동에 사용할 계책을 세우시니라. 정미(丁未 : 서기 1907)년 가을에 서산공께서 먼저 그에게 접근하여 신용을 얻으신 다음, 이듬해에는 춘궁기(春窮期)에 돈을 꾸어 추수 후에 배로 상환하는 소위 농사장려금을 얻기로 하시니라. 처음에는 사양하는 듯하시다가 드디어 3형제분의 재산 전부를 담보하여 3칠(三漆 : 칠원 · 칠북 · 칠서) 일대 주민이 넉넉히 쓸 만한 정도의 거금으로 제의하여 그의 재산보다 더 많은 5천 원을 차용하시니 이는 상답(上畓) 수10만 평에 상당하는 거금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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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형제분은 이 거금으로써 당초의 계획에 따라 장차 거사시에 사용할 화승총(火繩銃)의 구입을 탐색하시는 한편, 칠원 도덕곡(道德谷) 깊은 곳에 공장을 차려 화약을 제조하시다가 왜헌(倭憲)에 밀고되어 중단하시고 은신하며 다른 방도를 모색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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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상제님께서 은신처로 찾아가 진언하시기를 "저도 이제는 미구(未久)에 호패(號牌)를 찰 연령이옵고 세상 물정도 다소나마 짐작하므로 어른들의 대사 도모에 감히 말씀드릴 수 있사옵니다. 저의 요량으로는 이번에 거금을 얻으심은 실로 하느님의 감응이오며, 선령의 감호(感護) 이옵니다. 그러나 이대로 구국운동을 추진하심에는 때가 늦사옵고 국외(國外)에서가 아니면 불가능할 듯하오며 지금 중국 만주의 간도 지방에는 우국지사(憂國志士)가 많이 망명 중이오니 활동이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하옵니다. 이 기회에 아버님께서는 중부(仲父)님과 함께 간도로 가셔서 근거지를 정하시고 이어 온 가족도 그곳에서 가서 대사 도모에 보좌하도록 하심이 좋은 계책이겠나이다." 하시니라. 복우도장께서는 상제님의 사리에 지당하고 시의(時宜)에 적합한 헌책(獻策)을 들으시고 감동하셔서 즉석에서 결정하시고 우선 도장, 서산 두 분이 이튿날 간도로 발정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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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우도장 서산 두 분께서는 만주에 도착하신 후 서간도 요령성 유하현(柳河縣)의 수둔구(水屯溝)를 정착지로 택하시고, 우선 전답 약간과 개간할 만한 황무지 10여만 평을 매수하여 이를 인근의 가난한 동포들에게 분할 대여하여 개간 · 경작하게 하시니 라. 또 전 가족이 거주할 집을 건조하신 다음, 도장께서 성솔(省率)을 위하여 다음 해 3월에 귀향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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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께서 거금을 가지고 만주로 망명하신 소문을 들은 왜인 산본은 회문리에 와서 남은 가족에게 행패를 부리고, 추수 후에는 담보로 잡았던 전가산(全家産)을 강제 압류하며 왜헌의 도움을 받아 더욱 횡포하므로 가족들은 혹심한 고초를 겪으시던 중 때마침 돌아오신 도장을 따라 만주로 떠나게 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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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 원년 기유(己酉 : 단기 4242, 서기 1909)년 4월 28일 날이 새기 전에 전 가족이 도장의 인솔하에 왜헌의 감시를 피하여 창원역에서 기차로 망명길에 오르시니, 일행은 10여 명이며 간단한 의류와 집기 등을 가지고 신의주로 가셔서 배편으로 압록강을 건너 마차로 수둔구에 안착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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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창원역을 출발하신 후 처음에는 망명 준비의 과로로 피곤하셨으나 미시(未時)경, 대전(大田) 부근에 임어하셔서는 정신이 상쾌하시고 기운이 충천하신 중에 마음공부를 조금도 늦추지 않으시니라. 이때 홀연히 일광(日光) 같은 용안에 황금색 용포의 신인(神人) 한 분이 현현(顯現)하셔서 우레 같은 음성으로 하명하시기를 "내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노라. 그대는 삼계의 진주(眞主)니 이는 막중한 천기(天機)라. 그대가 나의 도통(道統)을 이어 치천하도수(治天下度數)로 무극대운(无極大運)의 대공사를 성취하되, 내 명교(命敎)를 받들어 태극(太極)의 진법(眞法)을 용(用)하면 무위이화(無爲而體)로 광구 삼계(匡救三界) 하리라. 그대의 호는 정산(鼎山)이니 나와 그대는 증정지간(甑鼎之間)이며 이도일체(以道一體)니라. 나는 구천의 천존상제로라." 하시니라. 상제님께서는 이 말씀에 정신이 더욱 활연하셔서 이 신인이 바로 진리의 당체이신 구천상제이심을 깨닫는 동시 "봉천명(奉天命)"의 도열(道悅) 속에 몸소 "태극진주(太極眞主)"임을 대오 자각(大悟自覺)하시고 삼계(三界)를 광구(匡救)하실 각오를 마음속에 맹세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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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은 이역(異域) 만주에서 망명 생활의 고난 속에서도 구국의 집념으로 고국에 있는 동포들의 망명길을 돕기도 하고, 만주 각처에 망명 중인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심에 일체의 경비를 전담할 뿐 아니라, 무의무탁한 동포들에게 주택과 식량을 나누어 주어 정착시키시니 불과 몇 년 만에 수둔구는 거대한 한인 집단촌으로 화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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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망명 생활 중 낮에는 가족들과 함께 농사에 임하시고 밤에는 공부에 정성을 다하여 힘쓰시다가 이해 추수 후에는 도장께 말씀드리시기를 "이는 천기이므로 아버님께만 은밀히 말씀드리옵는바, 저는 지난 4월 28일 망명길에서 '15세에 도강이서(渡江而西)하여 정진주(定眞主)의 도수(度數)와 치천하(治天下)의 도수로 광구삼계(匡救三界) 하라'하시는 천명과 신교(神敎)를 받들어 모셨나이다. 주경야독의 공부만으로는 부족하므로 이제부터 상제님의 천명을 받들어 노고산(老故山)에 들어가 진법도수공부(眞法度數工夫)에만 전념하려 하오니 주선하여 주시옵소서." 하시니, 도장께서 흔쾌히 승낙하시고 노고산의 계견성(鷄犬聲)이 들리지 않는 은적(隱寂)한 곳에 공부처를 마련하여 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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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당일로 입산하셔서 남모르는 공부는 홀로 하여야 하므로 시종도 물리시고 손수 취사와 난방 등 잡무까지 하시면서 근 2년간을 두문불출(杜門不出)하시며 풍우한서(風雨寒暑)를 불고하시고 불철주야(不撤晝夜) 공부에 정진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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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庚戌 : 도기 2, 서기 1910)년에 이르러 왜국의 침략이 극도에 달하여 드디어 한일합병조약이 조인됨으로써 한국은 완전히 왜국의 식민지화하니라. 이러한 망국의 한을 풀 길이 없으신 복우도장 가족들은 3일간을 망배통곡(望拜痛哭) 하며 항일투쟁의 결의를 더욱 굳게 다짐하시니라. 도장께서는 한인들이 거출한 성금을 군관 김혁(金赫) 이석대(李碩大) 등을 통하여 독립군에게 원납(願納)하셨으며 서산공은 수차에 걸쳐 만인(滿人)으로 변장하고 만주 각지의 동지와 연락을 취하시며 적의 정세를 염탐하여 독립군에게 제보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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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둔구에서는 황무지 개간 후 2년에 걸쳐 정성으로 경작한 결과 풍작을 이루니 전지주(前地主) 만인들은 자기들의 옥토를 기만당하였다고 원가환매(原價還買)를 요구하며 쟁의를 일으키고 수십 명씩 작당하여 행패하니라. 이에 한인촌에서는 도장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격퇴시키니 만주인들은 도리어 한인들이 먼저 폭동을 일으켰다고 관서에 제소하였으나 한인들은 단결과 기지로써 이에 대항, 승소하니라. 이 사건으로 도장께서는 한인들의 추앙과 만인들의 신망이 높아지셔서 촌장으로 추대되시고, 그때 근친(覲親)하러 하산(下山)하셨다가 사건에 공헌하신 상제님을 당총각(堂總角)으로 추앙하니라. 이로부터 한인촌의 단결은 더욱 굳어졌으며 그 명성이 전파되어 만주인들의 횡포는 근절되고, 서간도 일대의 망명 지사들이 이곳으로 찾아 들어 그 연락처가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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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辛亥 : 도기 3, 서기 1911)년 4월에 도장께서는 과거 취당공과 함께 구국운동에 활약하던 이동녕(李東寧) 등이 북간도 용정(龍井)에 망명하여 독립군을 양성 중이라는 소식을 들으시고 서산공을 보내셨더니 "자금이 부족하여 곤경이라." 하므로 여러 차례 자금을 마련하여 원조하시니라. 한 번은 중도에 어떤 여관에서 왜헌의 습격을 당하셨으나 목침으로 일당을 격퇴시키고 자금을 무사히 전달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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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이해 9월에 2년간의 공부를 마치시고 하산하시니, 복우도장께서 여러 중매처 가운데 밀양 청도(淸道) 출신으로 만주 동풍현(東豊縣)에 망명 거주하시는 지사(志士) 의흥 예씨(義興芮氏) 휘 한기(漢基)의 장녀를 간택하셔서 10월 15일에 성혼시키시니라. 신부는 선비 가문에서 성장한 규수로서 후덕한 성정에 용모와 재예가 출중하시니 휘는 종린(鍾麟), 도호는 숭도부인(崇道夫人)이시며 도인들은 안어른으로 존칭(尊稱)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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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부친의 명에 따라 성혼하셨으나 신혼생활도 아니 하시고 다시 노고산 공부처로 임어하셔서 시종도 없이 홀로 공부하시다가 다음 해 3월에 하산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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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壬子 : 도기 4, 서기 1912)년 봄에 복우도장께서는 아우들과 동지를 규합하여 항일운동에 골몰하시더니, 중국의 집권자 원세개(袁世凱)의 관헌에 의하여 청조(淸朝)의 복구를 도모하는 보황당(保皇黨)과 동류라는 혐의로 구인(拘引)되시어 요령성도 심양(瀋陽)에서 극형을 선고받게 되시니라. 상제님께서는 심양까지 구인되시는 도장을 수행하셔서 그곳 관헌에 교섭하셨으나 해결되지 않음으로 도장의 명의로 "우리는 한국인으로서 항일운동의 일념뿐이니 어느 겨를에 귀국 사에 간여하리오?"라는 요지의 진정서를 북경의 원세개를 직접 만나 전하셨더니 원이 그 문장과 충정에 감탄하고, 급히 심양에 명령하여 도장을 무죄방면하고 사과하며 본댁까지 호송하여 드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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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보황당 사건으로 심양에 임어하셨다가 그 지명이 근년에 봉천(奉天)으로 개칭된 사실을 비로소 확인하셨으며, 또 북경에서는 중국 대륙의 웅대한 산천과 화려한 문물을 친감(親鑑) 하시고, 이곳이 바로 평소에 염원하시던 공부처임을 감지하셔서 대중화도수(大中華度數)를 공부하기로 결심하시니라. 귀가하셔서 근친하신 즉시 이와 같은 사유를 허락받으시고 행장을 수습하여 공부차 다시 홀로 중국 본토로 출어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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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밀양서 망명 중이던 외숙 민영하(閔泳夏)는 상제님께서 정진하시는 공부가 신이(神異)하고 비상하심에 감복하여, 자기도 중국 본토 공부에 함께 할 수 있으면 일체의 경비를 부담하기로 은밀히 부탁하니, "제가 하는 일은 남이 알거나 간섭하여도 아니 되고 스스로 하는 공부며 이는 어느 한 사람을 위한 공부가 아닌 사해창생(四海倉生)을 위하는 삼계의 공부이므로 외숙의 사사로운 부탁은 들어 드릴 수 없나이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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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5월에 상제님께서 중국 본토에 임어하셔서 북경 일대의 산천과 문물을 두루 관찰하시고, 산동 지방으로 순행하시며 태산(泰山)의 공자묘(孔子廟)를 비롯한 명산대천에서 공부하시며 도수를 보시니라. 다시 화남의 남경(南京) 상해를 거쳐 서방의 성도(成都) 장안(長安)으로 순행하시며 공부하시는 동안 하남(河南) 고현(苦縣)의 노자묘(老子廟) 등봉(登封)의 소림사(少林寺) 산서(山西) 운성(運城)의 관왕묘(關王廟) 등 유명한 산천 묘우(廟宇) 사찰을 편력하시고 6개월 만에 환어하셔서 노고산에서 공부를 속행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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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辛亥 : 도기 3, 서기 1911)년에서 계축(癸丑)년까지 3년간 간도 일대에는 가뭄이 심하여 농사 작황이 큰 흉년이었으나 다행히 수둔구만은 풍작이 되어 도장댁의 생계에는 지장이 없으니라. 그동안 상제님께서는 명산대천의 치성 수도와 도수 공부에 집중하시고, 도장 형제분은 독립운동에 관여하시기에 매우 바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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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공께서는 계축(癸丑 : 도기 5, 서기 1913)년 10월에 상처하고 다음 해 11월에 귀향하여 재혼한 후, 다시 만주로 돌아와 독립운동에 전념하시니라. 을묘(乙卯 : 도기 7, 서기 1915)년 2월에는 오랜만에 댁에서 유하시더니 새벽에 급습한 왜헌에게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신해(辛亥 : 서기 1911)년에 용정(龍井)서 목침으로 왜헌을 격퇴한 사실까지 탄로되어 결국은 3년 징역을 선고받아 안동(단동)형무소에서 복역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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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공이 구금되시자 상제님께서는 도장과 함께 당국에 교섭하셔서 극형을 면하게 하시고, 복역 중에는 자주 형무소에 임어하셔서 옥고를 위로하시니라. 병진(丙辰 : 도기 8, 서기 1916)년 3월에 서산공께서 감형으로 출옥, 귀가 시에는 통자강(通子江)의 빙판을 건너시다가 얼음 속에 빠지심을 상제님께서 발견하시고 맞구멍을 뚫어 구출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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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께서는 구국운동의 동지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등이 "간도 지방의 흉년과 왜헌의 횡포로 활동이 여의치 못하므로 계축(癸丑 : 서기 1913)년에 상해로 이주하여 동지들과 함께 활동 중이나 자금이 부족하여 난관이라."는 전갈을 받으시고 병진(丙辰 : 서기 1916)년 8월에 자금을 마련하여 상해로 출발하시니라. 이때 상제님께서도 수행하셔서 자금을 전달하신 후, 도장께서는 귀가하셨으나 홀로 남으셔서 지난 임자(壬子 : 서기 1912)년에 마치지 못하신 "대중화도수공부(大中華度數工夫)"를 속행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