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진경
제목 | 태극도 - 태극진경 5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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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황상제님께서 무자(戊子 : 도기 40, 단기 4281, 서기 1948)년 원조에 임원들을 시좌시키시고 고명(誥命)하시기를 "오도의 도명이 태극도(太極道)임을 만천하에 공표하노라. 지난번에는 다른 데에 알림을 금하였으나 이제 도수에 닿았으니 임원과 도중(道衆)이 일심으로 이의 현창(顯彰)에 힘을 다하라." 하신 다음, 주문의 무극도주를 태극도주로 고치시고 진법주의 "외선조 응감지위"에 이어 "처선조 응감지위 · 처외선조 응감지위"를 추가하게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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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중산도인 이강인(李康仁)에게 하문하시기를 "너는 도를 믿은지가 몇 해나 되며 또 도를 알고 믿느냐? 다만, 용직의 권고로 믿느냐?" 하시니 "저는 우리 도가 천지 대도임을 알고 믿사오며 무극도 당시부터 믿어 왔나이다." 하고 아뢰니라. 또 임규오(林奎五)에게 "너는 부모상(父母喪)의 기한을 3년으로 정한 이유를 아느냐?" 하시므로 "어린애가 강보(襁褓)에 싸여 양육되는 기간이 3년이므로 보은의 거상기간(居喪期間)을 그렇게 정한 줄로 아나이다." 하고 아뢰니 "너희들의 말이 모두 도인다운 말이로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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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하교하시기를 "오도의 개화(開花)와 낙화(落花)가 모두 태인 땅이었으니 태인(泰仁)은 '큰 씨'라, 싹이 트고 자랄 연유이나 꽃이 피었다 짐은 결실을 위함이니라. 그동안 오도가 잠룡 도수 10년의 포태기(胞胎期)를 지나 회문도장에서 태극도로 중창하여 현룡도수(見龍度數)인 장생기(長生期)를 맞은 다음, 또 3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규오의 말대로 강보에 싸여 있을 기간은 이미 지났느니라. 그러므로 잠룡에서 회룡하였으니 다시 현룡 · 비룡으로 화하여 관록 · 제왕기(冠祿 帝旺期)를 맞으리라. 임원들은 이 천기를 위념물실(爲念勿失)할지어다." 하시며 잠룡 10년간의 고난을 상기시키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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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하문하시기를 "그대들 중에 누가 부산(釜山)의 지리를 잘 아느냐?" 하시니 강인이 아뢰기를 "저의 처가가 부산이옵고 친지가 많사오며 그중에 무극도 시절부터 도인인 최위출(崔渭出)을 통하면 자세히 알 수 있나이다." 하니라. 상제님께서 "그러면 네가 가서 내가 공부하기에 적합한 집을 선택하라. 그곳은 부산의 산맥이 끝나는 곳이라야 하고, 용은 물이 있어야 하니 바다가 보여야 하며, 수(水)자가 든 땅으로서 태인 도장처럼 치마바위가 있어야 도수에 맞되, 천장(天藏)은 정신일도(精神一到)라야 찾느니라." 하시며 구입 대금 일부를 내려 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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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교하시기를 "부산은 이 강산의 동남단에 위치한 도시로서 그 지세는 국토의 신산(神山) 백두에서 비롯한 산세가 그 척추격인 백두대간의 금강산과 태백산으로 이어져서 다시 일월산 주왕산 보현산 금정산으로 이어진 낙동정맥이 남으로 뻗어 내린 정기가 응결되고, 영남지방 전체의 하천이 모여 흐르는 낙동강과 동해가 굽이치는 산진수회처(山盡水廻處)의 영국(靈局)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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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부산은 이 나라 제일의 국제항으로서 관문일뿐더러, 장차 만방의 사람과 물화가 이곳을 통하는 군창지(群倉地)이고 생문방이며 새서울이니, 대해(大海)라야 대어(大魚)가 살고 대지라야 대신명이 임함이니라. 증산 상제님께서도 일찍이 병오(丙 : 도기 전 3, 서기 1906)년 가을에 이곳에 임어하셔서 소 백두(百頭)를 대신한 백우(白牛)를 잡아 공사를 보셨으며, 또 부산(釜山)의 글자 형상이 팔금산(八金山) 또는 입금산(入金山)이라, 증산 상제님께서 '내가 장차 금산사(金山寺)로 들어가리라.' 하신 곳이 바로 이곳이니 천장길방(天藏吉方), 태극원점(太極原點)의 기지(基地)를 입금산(入金山)이라야 얻을 수 있느니라." 하시며 "가마산이 곧 솥산인 줄도 알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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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은 명을 받들고 당일 부산에 가서 감천동(甘川洞)에 사는 최위출을 만나, 상제님의 명령을 전하고 함께 며칠간 여러 곳을 수소문한 끝에 하명과 부합되는 집을 찾으니라. 우선 그 지형 · 지세가 낙동정맥의 남단인 엄광산(嚴光山 : 일명 고원견산)이 구봉산(龜峯山)으로 이어진 산맥의 끝을 이루는 치마바위가 있어 길이는 태인 도장에 비하여 반쯤 되나, 높이는 배가 넘으니라. 오른쪽으로는 구덕산(九德山) · 천마산(天馬山)으로 연맥된 백호와, 왼쪽으로는 복병산(伏兵山) · 용두산(龍頭山)으로 연맥된 청룡이 뚜렷하고 절영도(絶影島)와 남해가 바라보이며 지명도 수자가 든 보수동(寶水洞)의 21번지니라. 집의 규모는 15평 정도의 2층으로 되어 크지 않은 주택이었으나 서남향 간좌(艮坐)의 집으로서 하명하심과 일치하므로 지체 없이 가계약을 체결한 다음, 회문도장으로 돌아와서 복명하니 상제님께서 혼연히 재가하시니라. 강인이 다시 가서 대금을 완불하고 내부를 수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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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에 상제님께서 임원들을 거느리시고 보수동 주택으로 이어하셔서 "집은 비록 협소하나 땅이 도수에 맞는 적지(適地)로다. 태극의 대운이 이에서 비롯되리니 이만하면 도장으로 좋이 쓰리라." 하시고 부산행재소(釜山行在所)로 칭명(稱名)하시더니, 이듬해 원조에 부산도장(釜山道場)으로 명명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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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부터 상제님께서 그 2층에 설석하시고 공부하시며 1층은 가족 일부와 임원들이 쓰도록 하시니라. 이때 전국 각처에서 포덕이 활발하게 일어나 도인이 갑자기 불어나니 그중에서도 충북, 경북지방이 더욱 그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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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에 상제님께서 "이 글은 내가 읊어 본 노래니라." 하시니 이러하였으며 도인들은 이를 도문가(道門歌)라 하여 즐겨 읊으니라.
도문가
우주는 호호(浩浩)하고 천지는 탕탕(蕩蕩)하다.
5만 년 길고 긴 용화세계(龍華世界)
8문을 넓고 높이 달았으니,
그 문이 무슨 문인고
1 · 6수 북문이요 2 · 7화 남문이요,
3 · 8목 동문이요 4 · 9금 서문이라.
건 · 곤 · 간 · 손 4우문(隅門)되어
궁을성덕(弓乙聖德) 정도령(正道令)은
대정수(大定數) 5 · 10토로 태극조성(太極造成)하였으니,
장하고 성하도다. 어화 세상 도우(道友)들아
이 문에 참여하여 극락행복(極樂幸福) 받아 보세.
시구시구(矢口矢口) 조을시구(鳥乙矢口)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시구(萬事矢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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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일에 청구(영래)가 회문도장에 가서 숭도부인께 "이번 치성에 쓰실 과하주(過夏酒)를 행재소로 가져오되, 다른 사람은 오지 말라." 하셨다는 상제님의 영을 고하니라. 이때 반상문 · 최현태와 함께 회문도장을 수호하며 가사에 종사하던 중산도인 박덕구(朴德九)가 과하주를 지고 숭도부인을 수종하더니 마산에서 차표를 사는 사이 과하주를 잃으니라. 덕구가 사방으로 수색 · 탐지하여 간신히 찾아서 행재소에 올라오니 상제님께서 꾸짖으시기를 "네 어찌 내 영을 어기고 여기에 왔느냐?"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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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에 상제님께서 타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꾸짖음은 네가 미워서가 아니니라. 거기도 내 집 여기도 내 집이고 한집에 살며 한솥밥을 먹으니 한 식구며, 더구나 네가 더위에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고생하며 걸어왔는데 어찌 밉겠느냐? 다만, 네가 내 영을 어겼으니 나는 비록 용서하고자 하여도 신명들이 벌을 주려 한 까닭이니라.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하시니라. 상제님께서는 영(令)의 준행을 이처럼 엄히 하시고, 또 영으로 일을 시키실 때는 반드시 복창하게 하셔서 봉명자가 완전히 납득하게 하시고 미흡하면 수차 반복시켜 착오가 없도록 하시더니, 며칠 후 회문도장에 남았던 집기를 덕구로 하여금 가져오게 하실 때는 몸소 마산까지 임어하셔서 다른 시종으로 하여금 수레에 실어 오게 하심으로써 덕구의 노고를 덜어 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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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말경에 승안차(承顔次) 행재소에 올라온 예천도인 권동흠(權東欽)에게 하문하시기를 "너의 집안에서는 입도한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하시므로 "아직은 저 혼자뿐이옵니다." 하니 "덕불고(德不孤)니라. 도는 외롭지 않은 법이니 벗이 있게 마련이라, 네가 실다운 종자가 되어 장차 많은 줄기와 덩굴이 벗어나게 하라." 하시니라. 동흠이 이 분부를 명심하고 지방으로 돌아와 우선 가화(家和)를 이루고 포덕에 분발하니 입도치성을 올려 주기에 바쁠 정도였으며 이때 다른 지방에서도 이처럼 입도인이 늘어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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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초에 상제님께서 임원들을 거느리시고 감천만 용담해변(龍潭海邊)에 임어하셔서 산책하시고 환행하시다가 그 근처에 사는 최위출의 집에 거둥하시니라. 그는 달포 전에 어느 공사장에서 입은 골절상이 심하여 기동을 못하는데 의사마다 "완치될 수 없다." 한다고 사뢰며 고쳐 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하니라. 상제님께서 그를 위안하시고 어수를 환부에 대시며 "너와 같은 성심자는 병신이 되지 않으리니 나를 믿고 안심하라." 하시더니 며칠 뒤에 완쾌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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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초에 상제님께서 동래 금련산(金蓮山) 마하사(摩訶寺)에 행행하셔서 대방(大房)에 설석하시고 백일공부를 시작하시니라. 이때 청암(승래)과 이강인이 시봉하고 주지와 승려들이 수종하였으며 임원들이 수시로 배알 · 봉교(拜謁奉敎)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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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상제님께서 공부하시던 중에 틈을 내셔서 임원들이 유숙하는 방으로 거둥하셔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방에 자주 나오지 않음은 그대들이 자유롭지 못하고 더욱이 담배로 불편함이니 이 자리에서 통죽(通竹)하여 '평등도수(平等度數)'를 보노라." 하시며 담배 한 봉을 풀고 담뱃대까지 내놓으셨으나 그 자리에서는 아무도 감히 피우지 못하므로 친히 불붙여 주셔서 피우게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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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또 임원들 방에서 백지에 친히 가는 글씨로 시천주(侍天呪) 여러 장을 쓰셔서 나누어 주셨다가 하오에 다시 회수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사람이면 누구나 오장육부가 있는 법인데 6부에서 5부를 내가 제치면 1부가 단독으로 어찌하겠느냐?" 하시며 임원들을 꾸짖으시니라. 그 자리에는 이용직 · 김명구 · 이강인과 신도균 · 정기택 등이 있었으나, 그들은 어의를 모르면서도 심히 두려워하더니 몇 년 뒤에야 도균과 기택 등이 배신할 것을 예시하신 질책이심을 깨달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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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중순 어느 날 상제님께서 시종들과 승려들에게 하문하시기를 "너희가 느끼는 일이 없느냐?" 하셨으나 아무도 사뢰는 이가 없으니라. 이때 이강인이 절뚝거리며 오는 모습을 보고 일동이 웃자 상제님께서 "호소신(好笑神)이 오는구나" 하시고 "법당의 불상에 이상이 없느냐?" 하시므로 살펴보니 그전에는 반듯하던 좌협시불의 머리가 숙여졌으므로 절 안이 온통 소란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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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마치시던 이달 15일 이른 아침에는 공부실 앞뜰에 청학 · 백학 한 쌍이 날아와서 공부실을 향하여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경배(敬拜)하듯 하다가 날아가니라. 또 이날 아침 환행에 앞서 공부 중에 모아 두신 친서(親書)를 청암에게 소화하여 그 재를 절 앞 개울물에 띄우라 하시므로 하명대로 하매 개울 위에 오색찬연한 무지개가 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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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하산하셔서 시종들을 거느리시고 승용차로 부산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신 다음, 도장으로 환어하시니 여러 도인이 한길까지 나와서 절하며 맞아 모시니라. 상제님께서 임원들에게 하교하시기를 "내가 무극대운을 태극진법으로 풀어 가느니 그대들은 오직 내가 베푸는 법방으로 신행(信行)하여야 공부를 성취할 수 있으리라." 하시고 또 "금번 마하사 도수는 '입금산도수(入金山度數)'이며 이제 부산에 들어왔으니 팔문(八門)을 열고 운수를 받아들여야 하느니라." 하시므로 모두 부복청령(俯伏聽令)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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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초에 박중하가 부산행재소에 올라와 상제님께 배알하니 구겨진 50전 지폐를 인두로 다려서 펴도록 명하시니라. 중하가 여쭈기를 "이것이 비록 돈이오나 요사이는 어린이의 용돈도 되지 않는 무용지물이온데 어찌 다리라 하시나이까?" 하니 "이것을 돈으로 생각하면 네 말이 맞다마는 나는 이것을 돈으로 보지 않고 도인들의 성(誠) 덩어리로 여기느니라." 하시니라. 이로부터 도인들이 성금을 올릴 때는 구김을 펴고 상하와 앞뒤를 바르게 정돈하여 올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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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己丑 : 도기 44, 서기 1949)년 4월 28일 봉천절 치성 후에 각 지방에서 날마다 증가하는 도인을 지도 · 교화할 임원체계를 정비하셔서 지방임원의 임명기준을 하명하시니라. 지방단위로 포덕호수가 5백호 이상은 포감(布監), 그 관하의 150호 이상은 선도사(宣導師), 또 그 관하의 50호 이상은 선도원(宣導員)으로 하시고 이 기준에 따라 중산에 이용직, 충주에 안상익, 김천에 김태만, 영주에 김명구를 포감으로 임명하시니라. 그 관하의 선도사는 각 포감들이 기준에 따라 상신하면 임명하셨으며 선도원은 선도사의 추천으로 포감이 임명하도록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임원은 내가 내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되어 올라오는 법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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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도의 체계가 확립됨에 따라 지방에서는 포덕이 더욱 활발하고 부산도장에 내왕하는 임원과 도인이 많아졌으며, 더구나 치성시에는 도장이 협소하니라. 이해 5월 말경에 임원들이 상의한 결과를 상제님께 상신하고 재가를 받들어 도장 앞집 한 채를 매입 · 수리하여 도중가족이 거처하는 도장내당(道場內堂)으로 정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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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가을 어느 날 청년도인 김태성(金泰成)이 성혼을 앞두고 상제님께 배알하니 이렇게 훈교하시니라. "남녀 혼인은 인륜(人倫)의 대사(大事)니 바로 오도의 강령인 음양합덕(陰陽合德)이니라. 태극의 도리가 그 원원(元元)이 음양합덕이니, 일음일양이 바른 자리를 지키며 기동함으로써 우주의 삼라만상이 생성발전하는 이것이 곧 정음정양(正陰正陽)의 근본원리니라. 혼인이 시속에서 말하는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합덕 · 조화의 도리를 기초로 하여야 하느니 너는 이를 평생 명심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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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이 혼례를 마치고 내외가 함께 배알하니 하교하시기를 "내 너희를 위하여 가정 규범의 원리를 설명하리라. 태극의 진리가 정음정양임은 이미 증산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바이나, 그 뜻은 남편이 남편답게 아내가 아내답게 제 도리를 다하며 서로 위하고 서로 화하여 합덕하는 것이니, 태극 진리가 곧 가정 규범의 원리니라. 이는 한 가정뿐 아니라 사회 · 국가 나아가서는 세계 · 우주가 구성 · 운용되는 원동력임을 알야야 하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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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도인이 기도의 대상을 여쭈니 하교하시기를 "기도의 최고 대상은 오직 구천 · 옥황 양위상제님뿐이니 불(佛) · 보살(菩薩) · 산신(山神) · 칠성신(七星神) 등은 구천 아래서 분임(分任)된 신명, 신장이니라.그러므로 선령신 지방신 등에게 빌더라도 큰 권능의 영험은 오직 무극주와 태극주께 기원함이 옳으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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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느 날 지방도인 이규섭(李圭燮)이 상제님께 배알하고 신중하게 여쭈기를 "종교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신이나 부처 또는 칠성이나 용왕에게 빌어 화를 면하고 복을 받으려 하옵는바 진정 비는 대로 영험이 있사옵니까?" 하니 이렇게 하교하시니라. "신 · 불에게 하는 기원 · 기도는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로되 기도를 하여도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기도대상의 권능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나, 우선은 그 기도인의 일심이 부족한 까닭이니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니라. 그러나 탐음진치(貪淫瞋癡)의 마(魔)가 마음 바탕에 깔려 있는 기도는 마의 기도가 되어 좋은 보응이 없으리니 도적질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도박 잘 되도록 빌어서야 어찌 복을 받을 수 있으랴? 또 도인의 일상생활에 송주 · 수도가 몸에 배이면 절로 악귀 · 악령의 침범이 없을 것이요. 위액(危厄)을 면하고 사사형통(事事亨通)하는 영험이 있으리니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는 이상과 현실이 합덕 · 조화된 성경신을 다한 수도와 치성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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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庚寅 : 도기 42, 서기 1950)년 원조 치성 후에 상제님께서 임원들의 세배를 받으시고 하명하시기를 "그동안 그대들의 진충갈력(盡忠竭力)으로 도인이 늘어나고 체제가 정립되었음을 치하하노라. 그러나 좋은 일에는 언제나 복마(伏魔)가 따르는 법이라. 금년에는 도 내외에서 몰아닥칠 환난의 고비를 넘기기가 지극히 어려울 남진원만북하회(南辰圓滿北河回) 대도여천탈겁회(大道與天脫劫灰)의 도수이므로 나는 이제부터 '복중80년도수(腹中八十年度數)'를 보리니 그대들은 도명(道命)의 지엄함을 각골명심하라." 하시고 다음 시를 외워 주시니라.
今年初開太平洋 摩訶巍巍中天踞
금년초개태평양 마하외외중천거
平天定海其何日 一萬二千驅馳時
평천정해기하일 일만이천구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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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상오에 지방임원들을 재촉하셔서 전부 임지로 출발하게 하시고, 도장에는 가족과 시종임원 몇 명만 남아서 유시 주일 기도를 마쳤을 때, 갑자기 형사 6명이 들이닥치니라. 형사들은 도장을 수색하고 상제님을 위시하여 도장에 있던 임원들을 모두 중부산 경찰서로 연행하여 용공혐의(容共嫌疑)로 가혹하게 고문 · 수사하여도 아무런 혐의가 없으니라. 일행은 무고(無辜)하게 며칠간 유치당하였다가 경북 도경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도 전혀 사실무근으로 드러났으나, 다시 예천경찰서에 설치된 경상북부지구 계엄사령부 군경합동수사대로 이송되어 고문 · 수사를 당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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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가족과 도인들은 불시에 당한 변고에 속수무책이었을 뿐 아니라, 연행 후에는 아무리 탐문하여도 수사당국에서 일체를 극비에 부쳤으므로 안위를 알 수 없어 당황하니라. 한편, 연행된 청암과 이강인 · 박봉상 · 황쾌섭 등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문의 고통보다도, 상제님께는 비록 고문이 없었으나 함께 구금되심이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몰랐으며, 그중에도 봉상은 현직 경관이므로 격리 수감되어 더욱 심한 고문 끝에 무고히 파면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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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에 무극도 해산 후 강모는 김모와 함께 전주를 떠나 의성(義城)으로 옮겨가서 독자의 교단을 세우고 방황하는 무극도 도인들을 은밀히 찾아다니며, 도주님께서는 왜경에게 시해(弑害)당하시고, 증산 상제님의 종통(宗統)은 저희들에게 이어졌다고 거짓으로 선전하여 신도를 모으기에 급급하니라. 그들은 해방 후에 교당을 김제 금산으로 옮겨 교세를 확장하였으나 항상 상제님께 대한 자신들의 배신이 두려운 나머지 태극도를 말살함으로써 이를 은폐하려는 흉계를 획책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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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군정청(軍政聽) 통위부장(統衛部長)을 지낸 유동열(柳東說)이 보화교를 믿으면서 증산교단을 통합하고자 하매, 태극도만 불응하고 타교단은 대부분 찬동하여 소위 증산교단 통정원(統整院)을 설치하고 동열이 그 대표인 통교(統敎)에 취임하니라. 강모 등은 자신들도 통정원의 고위직이 된 기회를 이용하여 동열로 하여금 태극도를 용공단체(容共團體)로 몰아 해산시키고 상제님께는 극형을 당하시도록 경찰과 계엄사에 압력을 가하게 하는 한편, 미리 엄병윤 · 신도균 · 정기택 등을 유인 · 매수하여 수사기관에 터무니없는 용공혐의로 상제님을 고발하게 하니라. 사건의 원인이 이와 같이 처음부터 허위 날조의 모략 · 중상임이 판명되어 상제님께서는 구금 3개월 만인 3월 초5일 곡우절(穀雨節)에 임원들과 함께 무사히 환어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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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임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번 도난(道難)으로 도의 큰 도수 하나를 무사히 마쳤느니라. 아무리 도수라 하더라도 인간의 공과(功過)는 있는 법이니 강모 · 김모 · 엄모 · 신모 · 정모 등은 오적(五賊)이며 도(道)척이니라. 이는 내가 연전에 마하사에서 도수를 볼 때 그대들에게 분명히 말하였으나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느니라. 다만, 이번 사건에 임한 그대들의 도심이 두터워 단 한 사람의 이탈도 없었음은 다행한 일이니라. 도인들은 저들에 대하여 원한을 품거나 복수를 생각하지 말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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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하교하시기를 "그러나 머지않아 삼천리강산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친 수화상충(水火相沖)의 대도수로 국운도 꽉 막혀서 이때는 비단 오적이 아니라, 크고 작은 원(冤)척이 발동하여 세상은 늦모찔 때 묘판(苗板)에 메뚜기 뛰듯, 콩 볶을 때 가마솥에 콩 튀듯 할 것이니라. 그때에도 그대들은 이번 도난을 거울삼아 나와 도를 믿고 성경신으로 도심을 더욱 견고히 하여 요동하지 말지니라." 하시고 다음의 옛 시를 읊으시니라. 이때 도인들이 기도시에 봉전(奉奠)하는 법수(法水)를 1기(一器)로 고정하시니라.
千山鳥飛絶 萬逕人蹤滅
천산조비절 만경인종멸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
고주사립옹 독조한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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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4월 28일에 상제님께서 봉천명일 치성을 마치시고 임원들을 공부실에 부복시키신 다음, 엄명하시기를 "지방임원들은 속히 임지로 내려가서 도인들을 독찰(督察)하여 난국을 극복하되 경거망동하면 자신뿐 아니라, 가족 친지까지 연루되어 패망할 운수니 깊이 명심하라. 이는 내가 보는 '복중80년도수'로서 기도문이 열리는 도수니라. 누차 말한 바와 같이 동청룡이 동하매 천하의 기운이 이곳으로 쏠리고, 회룡이 현(見)하매 세계의 대신명들이 이곳으로 몰림이니, 천기는 어찌할 수 없느니라. 천하가 소란하고 강산이 초토(焦土)가 되어 무고한 창생이 무참하게 마구 살상을 당할 것이나, 그대들은 오직 나와 도를 믿고 일심을 가지면 지난 도난에서와 같이 무사할 것이며, 이 고비를 지나야만 나는 또 하나의 큰 도수를 완전성취할 수 있느니라." 하시고 임원들의 다짐을 받으시니라. 임원들은 다음날 급히 임지로 내려가서 엄명을 전(全)도인에게 전달하여 당시에 난립 된 주의 · 사상에는 일체 가담하지 못하도록 독찰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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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지난 을유(乙酉 : 도기 37, 서기 1945)년에 세계 제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이 나라는 해방이 되었으나 전승국들에 의하여 소위 삼팔선이라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에는 미국군,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함으로써 남북으로 분단되니라. 또 무자(戊子 : 도기 40, 서기 1948)년에는 남북이 별개의 독립 정부를 수립하게 되니 남한에서는 자유 · 공산의 주의와 우익 · 좌익의 사상이 민심을 더욱 혼란하게 하였으나, 이해에는 정국도 차츰 안정되고 민심도 평정되어 미군도 철수하기 시작하게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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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5월 초10일은 양력 6월 25일이니라. 이날 미명에 북한군이 삼팔선에서 기습 남침하니, 무방비 상태의 남한 국군은 후퇴하여 불과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달포 남짓에 전국이 점령당하다시피 되니라. 유독 팔공산(八公山)과 낙동강 동남쪽의 부산 · 대구 등지는 국군이 끝까지 고수하다가 국제연합 16개국이 참전, 지원함으로써 반격하여 8월에는 수도를, 9월에는 평양을 탈환하였으며 11월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하니라. 연말에 중공군(中共軍)의 개입으로 소위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의 격전이 계속되다가 3년 후인 계사(癸巳 : 도기 45, 서기 1953)년 6월 17일, 양력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성립되니 이것이 민족상잔의 비극인 6. 25사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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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변이 일어나자 많은 국민이 남으로 피란하였으며 도인들도 함께 남하(南下)하여 부산도장 근처로 모여들어 판잣집 · 토담집 등 임시 건물을 짓고 난민 생활을 하게 되니 보수동 일대는 도인들의 집단지가 되니라. 이때 상제님께서 도인들에게 생계보조와 직장알선 등 여러 가지로 애휼하심으로써 생활이 단시일에 안정될뿐더러, 상제님을 지척에서 모실 수 있고 집단생활로써 신심과 단결이 강화되며 도인 간의 친목 · 협동이 두터워져서 수복 후에도 귀향하지 않고 거의 그대로 정착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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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각 지방에서 피란하지 못하고 사변을 겪은 도인들은 전투지역에서 생명의 위협을 당할 때는 물론, 수복 후에도 도령(道令)에 따라 근신함으로써 다행히 생명은 보존하였으나, 지방마다 친척 · 친지 간에도 주의 사상이 다르면 서로 싸우고 죽이는 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수한 고난과 역경을 겪다가 부산 도인들의 소식을 듣고 기회를 보아 재산을 정리하여 도장 부근으로 이주하는 도인이 날로 늘어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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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변 중 전장에서의 살상과 파괴도 심하였거니와 비전투지역에서도 북한 패잔병들이 저지른 살인 · 방화 등 만행과 이를 섬멸하려는 국군의 작전으로 생겨난 피해도 많으니라. 이해 7월에 북한군이 함안(咸安)까지 점령하였을 때, 회문도장에 있던 도중가족 일부와 박덕구 등은 극심한 박해를 당하였으며 수복 후에는 "패잔병의 은신처가 될 우려가 있다."는 구실로 국군이 회문리 인근 마을의 가옥과 산림을 불태울 때 회룡재도 도장과 함께 소실(燒失)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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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란 중에도 지방임원들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도가를 순회하며 지도 · 격려하기 위하여 격전지를 통과하며 사경의 고난을 겪는 일이 비일비재하니라. 더구나 각 지방에는 가는 곳마다 검문 · 검색이 심하고 교통도 불편하여 수십 수백 리 길이라도 걸어야 하고 또 야간에 밀행(密行)하는 등 어려움이 극심하였으나, 이를 극복하고 매월 1회 이상 빠짐없이 도가를 순방하여 도령을 전달하고 교화를 실시하며 포덕을 독려하다가, 월말에는 도장에 올라와 상제님께 배알함을 차착없이 봉행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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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도 이용직(李龍稙) · 박순석(朴順錫) · 안영국(安永國) · 김영흠(金英欽) ·김중태(金重泰) · 유원규(柳元珪) 등이 혹독한 고초를 겪으면서 상정하니 상제님께서 그들의 일심을 치하하시니라. 그들은 사지 속에서도 그때마다 상제님을 지극히 생각하며 그 계도(啓導)하심에 따르면 어려움이 저절로 해결됨을 무수히 체험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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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어느 날 순석이 상제님께 여쭈기를 "이번 사변으로 부산이 이 나라의 임시 수도가 되었사오니 도주님께서 예시(豫示)하신 '새 서울'에 적중됨이 아니오니까?" 하니, "내가 말하는 새 서울이 어찌 한 나라의 수도이랴? 새 서울은 구천 상제님의 도수에 따라 내가 공부하여 설법(設法)하는 통일신단(統一神檀) · 조화정부(造化政府)로서 삼계를 광구할 태극기동(太極機動)의 원점(原點)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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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회룡재가 소실된 소식을 들으시고 하교하시기를 "인간이 무도하면 금수와 다를 바 없으며 그 극단(極端)이 전쟁이고 살인이어늘 동족상잔의 비겁(否劫) 속에 어찌 방화만을 탓하랴? 회룡재가 소실됨은 가석한 일이나, 이로써 전화(戰禍)가 감소된다면 오히려 불행 중 다행이니라. 또 잠룡이 장차 현룡 · 비룡하기 위한 회룡에 화둔(火遁)을 묻는 도수였느니 무가내(無可奈)니라. 그러나 동란(動亂)이 있으면 정란(靜亂)도 있는 법이라, 소진(燒盡)이 있으면 복건(復建)도 있고, 결원(結冤)이 있으면 해원(解冤)도 있는 법이니라. 도인들은 세상이 아무리 소란하고 무도하여도 도를 믿고 도를 닦으며 도를 펴는 데만 전념하면 나머지 일은 도수에 따라 이루어지리니 진도(眞道)는 부동(不動)이요, 도심(道心)은 불란(不亂)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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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치성 후에 말씀하시기를 "비행기가 폭탄을 싣고 공중을 나는 것은 어느 지점에서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함이니라.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하라 마라 말하기에 앞서 먼저 4대문 안의 공기를 없애면 들어오지 못하리니 이것이 이기(理氣)니라. 혹여 들어온다 하여도 신명으로 하여금 그 눈을 가리면 용사(用事)하지 못하는 법이니, 신명계의 일은 인간이 추측하지 못하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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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어느 날 보수동과 동대신동(東大新洞) 경계 근처의 판옥촌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강한 서북풍에 가세한 화염이 도장 쪽으로 급히 번져 오니라. 이때 상제님께서 이 보고를 받으시고 서북방향을 바라보시자 서북풍이 갑자기 동남풍으로 바뀌며 절로 진화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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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辛卯 : 도기 43, 서기 1951)년에 각지에서 입도하는 도인이 더욱 증가하여 수천 호를 이루고 도장 부근으로 이주한 도인도 수백 호에 이르니라. 상제님께서 부산지역을 중부(中部), 그밖에 지역을 지방(地方)으로 정하시고 임원들의 연고지명을 붙여 방면명(方面名)으로 호칭하게 하시며 도인도 중부도인과 지방도인으로 구별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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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하순에 도장이 번잡하여 공부하시기에 불편하시므로, 부산항과 멀리 대마도(對馬島)가 바라보이는 도장 뒷산 중턱에 김천(金泉) 도화(金容和)로 하여금 4칸퇴 규모의 집인 김용을 짓게 하셔서 공부설석하시고 "산정(山亭)"이라 명명하시니라. 이때 상제님께서 지난 2년간 불철주야로 계속하시는 공부를 "복중 80년도수에 따른 '휴전도수(休戰度數)'라." 하시고 납폐지를 소화하시며 공부하시니라. 납폐지는 처음에 박순석 · 박재승(朴在勝) 등 시종들이 붓으로 써서 올렸으나, 나중에는 그 장수가 많으므로 도장을 새겨서 찍게 하시다가 등사판(騰寫版)으로 등사하게 하시고, 소화하실 때는 그 연기가 너무 많이 나므로 공부방에 별도의 연통(煙筒)을 내게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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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 아래 축대(築臺)는 그 높이가 두어 길이더니 이해 여름 폭우에 두 차례나 무너지니라. 충주도인들과 박재문(朴在文)이 이를 지성으로 쌓아 다시는 무너지지 않음으로 상제님께서 그들의 공로를 치하하시니라. 그중 재문은 원래 농아였으나 상제님께서 치하하시는 순간 말문이 열리고 소리를 듣는 정상인이 되니 본인은 물론, 도중이 모두 탄복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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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9월 22일에 복우도장께서 향년 74세로 도장 내당에서 화선하시니, 상제님께서는 더없이 애통하시고 양례를 도장(道葬)으로 모시니라. 초종범절(初終凡節)을 승중제도(承重制度)와 같이 장자 청봉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시니 도중이 엄숙 · 경건하게 받들었으며, 장지는 부산 아미동(峨嵋洞)과 감천동 사이의 반월령(半月嶺) 서북편에 정하여 장례를 모셨다가 병신(丙申 : 도기: 48, 서기 1956)년에 회문리 선영하로 면례(緬禮)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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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어느 날 박봉상이 시좌하여 여쭈기를 "저희들 범인으로서는 추측하기 어려운 인간 사후(死後)와 신명계의 일을 가르쳐 주옵소서." 하니 상제님께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니라. "사후와 신명계의 일은 세계의 모든 종교에서 설하는 것이 대동소이하나 본래 사람의 생사(生死)는 정신과 육체의 취산(聚散)이니, 사후에 육체에서 떠난 정신은 혼 · 백(魂魄)으로 나뉘고 이것이 생시에 쌓은 수도의 공덕에 따라 신(神) · 귀(鬼) 영(靈) · 선(仙)의 차등이 있으나 모두 신명계로 돌아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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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그러나 이 신명의 주처(住處)는 곧 삼계니라. 또 극락과 지옥 같은 일정한 처소에서 영구무궁(永久無窮)한 것만은 아니니 사후에 지방신 · 문명신 등이 되어 가장 높고 좋은 궁궐과 누각에서 향락하는 자도 있고, 악신(惡神) · 적신(賊神) · 무서신(無序神) 등이 되어 누추한 곳에서 신음하거나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되어 유리 · 방황하는 자도 있느니라. 그러나 다시 닦음에 따라 상승도 하고 하락도 하며, 환생(還生)도 하고 전생(轉生)도 하느니라. 다만, 선천에는 그 질서가 바르지 못하여 신명계에도 착란(錯亂)과 원울(冤鬱)이 있었으나 후천에는 모두 해원시키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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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거니와 신명계에서도 수도 공부는 계속하여야 하느니 수도한 신명은 향상(向上)하되, 원척을 풀지 못하고 악업(惡業)을 자행하는 신은 더욱 하락하므로 생전에 대도를 믿고 닦은 상대신명(上臺神明)의 영화와 죄얼(罪孼)이 많은 척신의 재앙과 고생은 언어나 문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사후 신명계의 복락은 생전에 상제님을 숭신(崇信)하고 국가에 충성하며 조상에의 봉사와 부모에의 효행을 힘쓰고 형제와 일가친척, 이웃과 우애하며 사회를 위한 일에 성경신을 다함으로써 얻으리라. 불신 · 불충 · 불효 · 불성 · 불경하여 살도(殺盜) · 음탐으로 삶을 마친 자의 사후 참혹상은 인계의 생활로는 비교할 수 없이 처절하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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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어느 날 상제님께서 임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중산토지관성(中山兎之管城)과 패택용지한수(沛澤龍之漢水)를 알아 두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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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壬辰 : 도기 44, 서기 1952)년 원조에 상제님께서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 "나는 다시 단도수(壇度數)를 보아야 하고 그대들에게는 급도수(級度數)를 붙이니 포덕에 더욱 힘써 모두 상급(上級)이 되도록 하라." 하시니라. 이 하명에 따라 각 지방에서는 앞을 다투어 포덕에 진력함으로써 도인수가 급증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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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에 도인들의 "납폐도수"를 하명하시니라. 납폐지는 가로 1촌 3푼, 세로 3촌의 선화지(仙花紙)에 기도주 · 태을주 · 도통주를 도장으로 찍어서 만들고 이를 1인당 5만 장씩 송주 수련 중에 소화하게 하시니, 그 종이가 많이 쓰여 도인이 많은 지방에서는 품절되기까지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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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임원들에게 하문하시기를 "너희들이 인간의 윤리 도덕과 법률 질서의 근본 원리가 무엇임을 아느냐?" 하시고 다음과 같이 하교하시니라. "나의 도리는 어렵지 않으니 곧 무극과 태극의 진리니라. 인간의 윤리 · 도덕은 공자의 유교만한 가르침이 없으니 그것이 인의(仁義) · 삼강오륜(三綱五倫)으로 표시되며, 서가의 교는 인간과 미물 곤충까지라도 자비(慈悲)하는 것이 또한 취할 만하고, 예수가 설한 박애(博愛)도 또한 일리(一理)가 있느니라. 그러나 이는 윤리와 법의 부분적인 방법일 뿐 완전한 원리는 아니니, 그 원리는 다만 태극 진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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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태극은 음양이니 음양이 조화한 합덕으로 개인이 생활하고 사회가 유지되면 그것이 천리에 순응하고 인륜에 계합(契合)됨이니라. 너와 내가 화(和)하고, 부모와 자식이 화하며, 형과 제가 화하고, 부부간에 화하면 인륜이 되고, 정부와 국민이 화하고, 자산가와 근로자가 화하며, 지주와 소작인이 화와 합(合)으로 생활하는 것이 바로 윤리 · 도덕의 사회니라. 여기에 만일 원(冤)척이 있으면 해원하여야만 상생의 길이 트이리라." 하시니라.
59
"내 일찍이 음양합덕 · 신인조화 · 해원상생 · 도통진경의 태극진리를 오도 신조(信條)의 원천(源泉)으로 게시(揭示)하였거니와 이 진리를 활연관통(豁然貫通)하는 것이 곧 우주 전체의 원리와 인간의 생활 윤리를 체득함이니라. 선이니 악이니 하는 인간의 언어 · 문자에 구애됨이 없이 음양합덕의 태극 진리로 생활하는 자는 저절로 인의와 자비 · 박애를 실천하여 이행함이니 이에 법률이나 사회질서 또한 절로 형성될 것이라, 이것이 곧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원칙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들 도인은 항상 합덕 · 조화 · 상생의 진리로 생활할지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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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하순에 각 방면에서 월성금을 올리니 상제님께서 하명하시기를 "이번에 '왕자 수금도수(王者收金度數)'와 '남신 헌금도수(南信獻金度數)'를 보아야 하니 이번 달과 다음 달의 월성금은 각 방면 포감들이 적임자를 지정하여 분산시켜 보관하였다가 내년 정월 월성금과 합하여 목돈으로 올리되, 모두 새 돈으로 올리도록 하라." 하시니라. 이때 각 방면에서는 하명대로 보관하며 새 돈으로 교환하기에 몹시 바쁘더니 다음해 정초에 시행된 화폐개혁(貨幣改革)으로 인하여 3개월분 월성금을 자연히 새 돈으로 올리게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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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癸巳 : 도기 45, 서기 1953)년 3월 말경 충주도인 김영하(金永河)가 산정에서 승안을 모시고 나오니 시봉 박종순(朴鍾淳)이 은밀히 말하기를 "우리는 지금 때를 금년이냐 내년이냐? 하고 고대하는데 도주님께서 오늘 은행 종자 한 홉을 주시며 '이를 잘 심어서 가꾸라.' 하셔서 모를 부었으니 정말 의심나고 땀나는 일이요." 하므로 "도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때는 여삼추(如三秋)로 기다리되 도는 평생을 닦아야 한다.'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내일 때가 되더라도 오늘 일은 오늘 해야 하지 않소?" 하니 수긍하니라. 다음 해에 상제님께서 그 묘목 중 몇 그루를 분재(盆栽)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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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4월 봉천명일 치성 후에 참례임원들에게 하교하시기를 "내가 지난 기유(己酉 : 도기 원, 서기 1909)년 이날 천명과 신교를 받들어 모신 이래 벌써 사십유오년(四十有五年)이라. 그동안 창도 · 포덕에 전력한바 이에 어언 이순(耳順)이니 그대들이 나를 신종(信從)하고 또 헌공함을 가상히 여기노라. 증산 상제님께서 '나와 그대는 증정지간(甑鼎之間)이라.' 하시고 또 '이도일체(以道一體)니라.' 하셨으므로 상제님의 도호 '증산(甑山)'에 이어 나를 '정산(鼎山)'으로 하셨느니라. 상제님께서는 무극주로서 재천(在天)하시고 나는 태극주로서 재인(在人)하니, 체용(體用)은 둘이 아니요, 하나니라." 하시니라.
63
이어 "증산 상제님께서 짜 놓으신 삼계대공사(三界大公事)의 도수는 무극의 체인 바 그것을 풀어 쓰는 것은 태극의 용을 맡은 나의 소임이니 이 곧 무극시태극(无極是太極)의 원리니라. 무극시태극이므로 무극과 태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무극 태극이 일체일용(一體一用) 뿐이니라. 오직 무극은 정(定)이요, 태극은 동(動)이니 무극은 체(體)와 이(理)며, 태극은 용(用)과 기(氣)니라." 하시니라.
64
"내가 상제님의 도수로 무극대도를 개창(開創)하였으니 이는 체를 밝힘이고, 다시 태극의 도문을 열음은 그 도수를 푸는 용의 기동이니라. 내가 이제부터 그대들에게 설(設)할 모든 법방은 무극주의 체를 태극주로서 용함이니라." 하시니라.
65
"그대들이 도인으로서 이 체와 용에 따라 공부함은 개인의 도통 완공에도 목적이 있으나, 천지인 삼계공사에 참여함이니 오만 년 후천선경을 완성할 성사재인(成事在人)의 큰 뜻을 알라. 그러나 구천의 도수와 나의 법방이 아니면 이룰 수 없음을 각골(刻骨) 명심할지어다." 하시니라.
66
"천지인 삼계공사의 도수는 호리(毫釐)의 차착(差錯)이 없으므로 이제 삼천리 동토에 아국(我國), 아도(我道)의 태극기가 가가호호에 휘날리고 있으나 이번 간지(干支)가 끝난 장래에는 세계인의 가슴마다 태극이 새겨질 날이 있을 것이며, 태극의 원리가 과학 문명과 정신문화의 기점(基點)임이 천명(闡明)되리니 이 곧 선경도수(仙境度數)의 일단이니라. 그대들은 오직 일심으로 수도하라. 일심은 곧 정심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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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임원 몇 사람이 상제님께 여쭈기를 "전 세계가 자유 · 공산 양진영(兩陳營)으로 갈라져 열전(熱戰)과 냉전으로 평온한 날이 없사오니, 어떻게 하여야 세계가 화평하고 인류가 안락하오리까?" 하니 이렇게 하교하시니라. "무릇 모든 종교는 국제정치나 국내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나 오도는 교정(敎政)을 일체로 하느니라. 태극의 원리는 우주의 대도이므로 모든 정치의 근본 사상임을 그대들이 알아야 하느니라. 지금 미국 · 소련 양대국이 앞장을 서서 자유 공산의 양진영이 대립하여 상극(相剋) · 상충(相沖) · 상투(相鬪) · 상해(相害)함으로써 인류가 진멸 지경에 처한 현상은 신계를 비롯한 인계의 피하지 못할 선천 과도역정(先天過渡歷程)의 비겁도수(否劫度數)니라. 이것이 내가 해결하여야 하는 한 소임이며 나의 강세와 공부의 목적 일부가 이에 있느니라. 그러나 나의 근본 소임은 인계에 국한하지 않고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치며 사람의 상극정신도 뜯어고치시는 구천 상제님의 도수를 합덕 조화 상생의 태극 진법으로 실현하여 삼계에 보화하는 청화오만 년 선경을 건설함에 있으니 인류의 화평은 무위이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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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아직도 양대진영의 정치가나 군사가 뿐아니라 세계를 움직인다는 석학들이 태극원리를 모르고 있으나 음양의 합덕 · 조화 · 상생으로 기동조화(機動造化)의 묘를 이루어 이제서인지악(以制西人之惡)하고 원자탄 · 수소탄은 물론, 살인광선도 소용없게 하여 전 인류가 구제되고, 나아가 선경세계가 이룩됨을 자각하도록 하리라. 나라들이 각각 다른 주의 주장과 틀리는 방식으로 생활하면서도 전체 인류의 발전을 위한 공동협력을 하게 되리니 이 곧 음양합덕인 태극의 기동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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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가을에 지방도인의 승안제도(承顔制度)에 따라 독실하게 믿는 도인 다수가 각기 담당 임원의 인도하에 부산도장으로 올라와 상제님께 배알하니라. 9월 하순에 미원(米院)도인 윤금현(尹金鉉)도 입도 후 처음 소속 포감 임규오(林奎五)의 인도로 승안을 모시니 그는 그 지방의 토호(土豪)로서 학식과 덕망을 갖춘 선비니라. 이때 금현은 상제님의 수라상이 맥반(麥飯)에 소찬 몇 가지뿐임을 보고 수만 도인의 도주이시므로 의식주가 호화로우실 줄로 예상한 바와는 너무 판이함으로 크게 깨닫고 도심이 더욱 견고해져서 근검절약을 평생의 신조로 하며 수도에 전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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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금현에게 하문하시기를 "너는 종전에 다른 종교를 신앙한 일이 있느냐?" 하시니 "유교는 선대로부터 전해 온 가풍이옵고 몇 년 전 친구의 권유로 도덕협회를 신앙하다가 그만두었나이다." 하고 사실대로 사뢰니라. 다시 하문하시기를 "그러면 나의 도를 믿어 보니 어떠하더냐?" 하시므로 금현은 존전에서 황감하여 머뭇거리다가 "그 교리(敎理)들이 모두 우리 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나이다." 하고 아뢰니 "나의 도는 구천 상제님의 공사에 따르는 천지인 삼계의 대도니라. 어느 한 사람의 복이나 빌고 선(善)이나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전 인류와 신명을 광구하여 함께 후천복록(後天福祿)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신 상제님의 도수로 진행되는 도이므로 오도는 결국 남 잘되게 하는 공부니라. 너도 다른 도인에 뒤지지 않도록 각골정려(刻骨精勵)할지어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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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11월 중순에 도장 공부실에서 7일간 식음을 전폐하시고 공부하시더니 하루는 갑자기 기식(氣息)을 거두시므로 가족과 임원들이 창황(蒼黃)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니라. 잠시 후에 쾌차하셔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사판단도수(生死判斷度數)'를 보아 증산 상제님께서 '나는 죽고 살기를 마음대로 하노라' 하신 도수를 풀었노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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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甲午 : 도기 46, 서기 1954)년 원조 치성 후에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 "금년 도수는 '구마이당로(九馬而當路)'니라, 이 도수는 나의 도가 도인이 모이고 세상에 알려지는 큰 도수니 만큼 그 목넘기 또한 어려울 것이니 도인들에게 언동을 각별히 조심하도록 단속하라." 하시고 중부도인을 지도 · 교화할 중부임원을 임명하시니라. 임원들은 구마이당로의 뜻은 알 수 없으면서도 감히 여쭈지 못하고 오직 상제님의 덕화로 모든 일이 잘될 것만을 믿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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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렵 각 지방에서는 포덕이 더욱 잘될뿐더러, 도인들의 정성이 지극하여 성금 헌납이 많아지고 중부로 이사하고자 하는 도인도 늘어나므로 지방임원들은 그 성적(成績)을 서로 비교 경쟁하는 양상을 이루니라. 그중에서도 충주지방 안상익 포감방면이 가장 현저하여 다른 방면의 배가 넘었으나, 이로 인한 말썽도 많으니라. 상제님께서 방면 포감 안상익과 부포감 박한경(朴漢慶) 등에게 수차 엄히 훈계하시기를 "도인들의 신심과 정성이 지극함은 가상한 일이나, 그것도 과하면 불여불급(不如不及)하여 폐단이 되기 쉬우니 물의(勿議)가 일어나지 않도록 정도(正道)를 지키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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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중순 어느 날 밤에 중부 영주방면 도인의 판잣집에 화재가 나니, 그 원인은 방안에 켜 놓은 촛불이 집을 비운 사이에 다 타서 판자에 붙어 발생한 것이나, 발화 즉시 이웃 도인들이 발견하여 껐으므로 가재도구만 조금 타고 큰 피해는 없으니라. 다음날 새벽에 상제님께서 공부를 마치시고 시종 박중하를 부르셔서 "어젯밤 어느 집에 불이 났는지 아느냐?" 고 하문하시니 중하는 상고한 사람이 없는데 어찌 아시는지 궁금하였으나, 상제님께서는 도가에서 일어나는 대소사를 사뢰지 않아도 항상 모두 알고 계시니라. 중하는 젊었을 때 부친의 명으로 입도하였으나 고등교육을 마치고 사회활동을 하다가 요즈음에는 상제님 측근에서 상근(常勤) 시종하면서도 반신반의하며 상제님을 존장(尊長)으로만 경대하더니 이로부터 신심이 굳어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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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낮에 상제님께서 영주방면 선도사(宣導師) 홍수암(洪壽岩)을 부르셔서 화재 상황을 보고 받으시고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 "도가가 모두 판잣집인데 간밤 불은 비록 큰 피해가 없었다 하여도 앞으로 만일 불이 나면 삽시간에 번져 많은 피해가 있을 것이므로 내가 '진화도수(鎭火度數)'를 보았느니라. 그러나 삼재(三災) 중에 수풍재(水風災)는 자연의 객기(客氣)에서 나오지마는 화재는 인간의 방심에서 나오기 쉬우니 전도인에게 불조심을 각별히 강조하라." 하시니라. 임원들이 이 명령에 따라 화재 예방을 위한 단속을 철저히 하니 이후 도가집단지(道家集團地)에서는 화재가 발생하지 않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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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중부도인들은 그 집이 도장과 가까울 뿐 아니라, 상제님께서 누구라도 친애하시므로 존전(尊前)에 무상(無常) 출입하더니, 하루는 "너희는 앞으로 내가 부르거든 오도록 하라." 하시니라. 이로부터 임원들이 도인들의 존전 무상출입을 통제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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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하순에 상제님께서 산정에서 '납폐도수' 공부를 계속하시며 시봉 박재승 · 이창로(李昌魯) 등으로 하여금 8괘 · 64괘와 유불선의 여러 경전(經典) 또는 성수명(星宿名) 등을 그리거나 쓰게 하셔서 소화하시며 "이는 '서역도수(書役度數)'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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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상제님께서 임원들에게 엄숙히 하교하시기를 "배를 타고 항해 중에 풍랑을 만나면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방향을 바꾸지 말고 그대로 항해하여야 하느니라. 만약 위험을 피하려고 항해를 멈추거나 방향을 바꾸려 하면 항해를 못 함은 고사하고 배까지 전복시키느니 도를 믿고 닦는 일도 또한 그러하니라." 하시고 지난 신유(辛酉 : 도기 13, 서기 1921)년 2월에 안면도에서 부안으로 항해 중에 겪으신 풍랑사(風浪事)를 말씀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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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청주에서 안상익 포감방면 임원들의 옥사(獄事)가 일어나니라. 당초에 지난 몇 년간 충주방면 안상익 · 박한경 · 유철규 등 임원들은 관하 도인들을 경쟁하듯 매월 수십 호씩 중부로 이주시키니라. 이로써 조치원역(鳥致院驛)은 도인들의 이삿짐 수송에 몹시 바빠 다른 일을 처리 못 할 정도였으며, 도인들이 많이 살던 동네에서는 그들의 재산정리에 따른 이상한 소문이 파다하니라. 개중에는 도인들이 "부산에 가야만 도를 믿을 수 있다."느니 "도만 믿으면 되지 재산은 무엇하느냐?" 하더라는 등 사실무근한 소문이 유포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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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소문이 와전(訛傳)되어 마침내는 도인들이 재산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이주하는 행위가 휴전 직후 불안한 시국에 혹세무민하는 유언비어 또는 용공분자의 소행과 비슷하다는 혐의를 받게 되니라. 충북도경에서는 소문의 근거를 찾으려고 형사들이 수개월 간 임원들을 미행하며 내사(內査)하였으나 지목된 안상익 · 박한경 · 유철규 · 김영하와 이갑성(李甲性) · 오득표(吳得杓) · 안영국(安永國) 등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니라. 이달 정기집회일인 18일 밤에 청주 서운동(瑞雲洞) 소재 포덕연락소에 모여 회의하고 영하가 상제님께서 하교하신 풍랑시(風浪時)의 항해법을 교화하던 중 한경 · 철규 · 영하 · 갑성 등 임원들이 도인 20여 명과 함께 형사들에게 체포 압송되어 도경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고문 · 취조를 당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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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갑성은 혹독한 고문으로 장시간 기절하였다가 다음 날 겨우 깨어나 기동을 못하면서도 그러한 사실이 없음을 극구 주장하여 3일 만에 다른 도인들과 함께 석방되니라. 그러나 한경 등은 고문에 못 이겨 자신들의 혐의를 시인하고 상제님의 행재까지 진술함으로써 도경의 형사주임(刑事主任) 송달헌(宋達憲)과 형사 여러 명이 부산도장에 급파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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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아침에 상제님께서 평일처럼 산정 공부실에서 도수를 보시고 잠시 쉬실 때 형사들이 급습하여 방자하게 추궁하였으나 상제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며칠간 수십 명의 중부도인이 진술한 바로는 아무런 혐의사실이 없으니라. 다만, 이미 입건 구속된 한경 철규 등의 혐의를 소명하자면 상제님께서 친히 충북도경 근처 사관까지라도 거둥하셔야 함을 말씀드리니 윤허하시고 청봉 등 세 자제분과 도인 정운교(鄭雲敎) 등의 시위를 받으시며 25일 청주 북문로(北門路) 북일여관(北一旅館)에 임어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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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에서 한경 등이 고문에 못이겨 분별없이 시인한 내용은 개인적인 사기 · 횡령 등 혐의와 함께 유언비어 유포, 용공단체 조직 등 국가보안법 위반의 혐의이며 또 이 모두가 상제님의 명으로 범행한 사실처럼 인정되어 있었으나 조사 결과 그 실제가 아님을 판명되니라. 그러나 한경 등의 개별적인 혐의가 완결되지 않아 상제님께서는 환어하지 않으시고 1개월간을 북일여관에 설석하시고 공부하시며 간간이 수사에 응하시니라. 이때 도경 사찰분실장(査察分室長) 김두길(金斗吉)의 집요한 추궁에도 사건은 더 확대되지 않았으나 한경 등 3인은 법원에 구속 · 기소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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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7일, 양력 4월 29일에 상제님께서 도장으로 환어하시는 길에 청주 화양동(華陽洞)으로 행행하셔서 도수를 보기로 하시니라. 화양동은 본시 백두대간에 속한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중간 산골인 괴산군 청천면(靑川面) 화양리의 계곡으로서 사적과 명소가 많고, 중국 무이구곡(武夷九曲)과 흡사한 절경지지(絶景之地)라 하여 예로부터 화양구곡(華陽九曲)으로 유명하니라. 그 제3곡에 송우암(宋尤庵)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 · 의종(毅宗)에 대한 보은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만동묘(萬東廟)를 짓게 제향을 드리게 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이 철폐한 것을 유생들이 중창하였더니, 왜가 다시 철거하여 훼손한 묘지(廟趾)와 묘비(廟碑)만 남아 있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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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곡에는 우암이 은거하며 학구(學究)와 교도(敎導)에 힘쓰던 암서재(岩棲齋)가 있고, 제5곡에는 우암이 문인(門人)들을 시켜 명나라 의종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큰 문자를 "숭정황제어필(崇禎皇帝御筆)"이라는 작은 문자와 함께 첨성대(瞻星臺) 아래 석벽에 새기니라. 그 좌측에 "배신 민정중(陪臣閔鼎重) 봉지(奉至) 여송시열등(與宋時烈等) 근배수계수(謹拜手稽首) 모륵(摸勒) 시사십칠년(時四十七年) 갑인 사월 일야(甲寅 四月 日也)"라는 작은 문자를 새겼으며, 우측에는 암벽에 세로로 석함(石函)을 파서 석개(石蓋)를 하고 이를 "석문(石門)"이라 이름하니라. 석문 아래에는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이라는 큰 문자와 "차팔자(此八字) 배신 송시열(陪臣宋時烈) 상서(嘗書) 여인자야(與人者也) 정의어차산중(正宜於此山中) 근모이륵(謹摸以勒)"이라는 작은 문자를 새겨 놓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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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하오에 상제님께서 청봉과 정운교 · 안상익 · 윤금현 등 시종을 거느리시고 승용차로 화양동에 거둥하셔서 만동묘(萬東廟)의 묘지와 묘비를 친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곳 청주 화양동은 명·청 양국(明淸 兩國)이 공존하는 곳이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황극신도수(皇極神度數)'와 '대신문도수(大神門度數)'를 보려 함이니라." 하시니라. 다시 암서재(岩棲齋)를 친감하시는 동안 해가 저물므로 "화양구곡을 다 볼 것은 없지마는 온 김에 제5곡까지 보고 가려 하였으나 해가 저물었으니 신도(神道)로써 공사하리라." 하시고 환어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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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행 중로인 청천(靑川) · 미원(米院) · 주성(朱城) 등지는 해가 지면 공비(共匪)의 출몰이 잦은 곳으로서 야간 통행금지와 군경의 경비가 삼엄하고 검문 · 검색도 심할뿐더러 도로 사정 또한 불편하기 그지없으니라. 시종들이 야간행행을 만류하였으나 계속 차를 타시고 보은 남일여관(南一旅館)에 임어하시니 자정(子正)이 가까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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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이 고향인 금현은 상제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싶었으나 감히 상고하지 못하고 시종만 하면서 행로의 검문 대응에 많은 시간을 지체하였을 뿐 아니라, 여관을 잡고 때늦은 수라 준비 등에 애를 쓰니라. 자정이 되어서야 수라상을 올리고 시좌하였는데 상제님께서 수저를 상머리에 한번 정저(整箸)하시자 그 순간 갑자기 뇌우전벽(雷雨電霹)이 천지를 진동하므로 시종들과 여관 사람들이 모두 무섭고 두려워서 몸 둘 바를 모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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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태연히 수라를 진어하시므로 금현과 운교는 물러날 수도 없어 묵묵히 시측(侍側)하고 있으니라. 뇌전은 한동안 계속되다가 마침내 벼락 치는 소리가 그 부근 일대를 때려 부수듯 한번 진동하더니 이내 그치고 소나기만 내리는데 상제님께서 상을 물리시며 혼자 말씀으로 "이제야 신문공사(神門公事)를 마쳤으니 다시 오지 않아도 되겠구나. 과시 보은지지(報恩之地)로다." 하셨으나 시종들은 어의를 깨닫지 못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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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에서 유어하시고 시종들에게 "내가 이번 길에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를 보고 가려 하였으나 다음으로 미루고 그대로 돌아가니 금현은 다음 치성에 올라오되, 그전에 이곳 일을 살펴서 포감을 통하여 나에게 자세히 고하라." 하시며 청봉과 운교를 승용차에 동승시키시고 부산도장으로 환궁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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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청주 일대에 "화양동 제5곡의 석문이 열렸다."라는 소문이 자자하니라. 금현도 소문을 듣고 그 사실을 확인하고자 인근 도인 윤석현(尹錫鉉) · 오병하(吳炳夏) · 박동한(朴東漢) · 김진협(金鎭協) 등과 화양동으로 가니 마침 상제님께서 파견하신 박종순을 만나 함께 그곳에 사는 빈재로(賓在老)를 만나니라. 재로는 본래 만동묘 창건 시에 청국에서 파송된 묘지기의 9대손으로서 대대로 봉직하다가 묘가 철거된 후에는 묘지 옆에서 농사와 주점으로 생계하는 사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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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로가 일행에게 말하기를 "우암이 석문을 만들며 그 속에 무엇을 어찌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르나, 그 후 비전(秘傳)되는 전설로는 '석문이 열리면 천지가 개벽되고 진인(眞人)이 세상을 구제하리라.' 하더이다. 만동묘를 철거한 왜경이 그러한 전설을 말살하려고 석수를 시켜 석문을 정으로 쪼아 열려고 하였으나 그때마다 갑자기 청천벽력이 일어나므로 혼비백산하여 중지하고 그 흔적을 양회로 때우는 것을 내가 직접 목격하였나이다. 또 지난 3월 27일 밤 자정에는 번개와 함께 뇌성이 울리며 비가 쏟아지더니 석문 쪽에서 벽력이 크게 일어 첨성대가 무너지듯 진동하므로 전율경악(戰慄驚愕)하고 이튿날 아침에 가 보니 석개가 열려 암벽 아래에 깨진 채 떨어져 있고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석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나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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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현 일행이 신기하게 여기며 그곳에 가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이 세로 3척 1촌, 가로 1척 9촌, 두께 5촌쯤의 석개가 두 동강으로 갈라져서 떨어져 있으므로 맞추어 보니 "옥조빙호(玉藻氷壺)"라는 큰 문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이라는 작은 문자의 음각(陰刻)이 완연하니라. 금현 등은 그제야 이 일이 증산 상제님께서 청도원에서 대신문(大神門)을 여시는 도수를 짜신 공사와 부합되며, 또 상제님께서 "신도로써 공사하리라." 하시고 석문이 열릴 그 시각에는 "이제 신문공사를 마쳤으니 다시 오지 않아도 되리로다." 하신 비의(秘意)를 깨달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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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에 임규오가 도장에 올라가 상제님께 배알하고 금현으로부터 들은 "화양동 석문 열린 일"을 상고하니 용안에 미소를 띄우시고 침묵하시니라. 규오가 다시 "이는 필시 증산 상제님께서 청도원(淸道院)에서 짜 놓으신 황극신도수와 대신문도수가 풀림이 아니오니까?" 하고 아뢰니 "오직 결자(結者)와 해자(解者)는 동체니라." 하시고 더 말씀이 없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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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5일 조회시에 상제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대들도 이런 일은 알아 두라. 불교의 교리가 좋다 하여도 현실에는 모순이 많으니, 남의 자식을 데려다가 제 자식을 만들고 농사도 짓지 않다가 남이 지은 양곡을 얻어먹으며 사는 걸사도(乞士道)에 불과하니라. 또 공자가 유교를 펴서 그 경서가 오늘까지 전하여 왔으나 그 많은 글들이 현실 생활에 그다지 유용하지 못하니, 이런 교들이 후천에 무용함은 증산 상제님께서 이미 도수로 짜 놓으신 바니라. 공자가 일세의 사부(師傅)로서 인의의 도리를 세상에 펴고도 죽어서는 천상의 제이문방신장(第二門方神將)밖에 되지 못하였으나, 자공(子貢)은 그 제자로되 오히려 제일문방신장(第一門方神將)이 되었느니라. 과거 성인에 대한 이런 말은 함부로 입 밖에 내기가 어려우나 다만, 그러한 교들로서는 세상을 구제할 수 없음을 이미 수천 년 역사와 오늘의 현실이 증명하고 있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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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교하시기를 "도덕이란 도의 꽃을 말함이니 예수교인들이 2천 년 동안 하느님 아버지만 믿어 왔으나 하느님도 그 근원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느니라. 예수는 인자(人子)로서 인덕(人德)을 펴라는 인(人)의 꽃이요, 불타는 각자(覺者)로서 불덕(佛德)을 펴라는 불의 꽃이니라. 그러나 오도는 도의 열매를 맺는 진인 (眞人) · 진신(眞神) · 진실(眞實) · 진법(眞法)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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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도에는 덕이 따라야 하느니 예수나 수운이 어떠하였던가를 보면 아느니라. 두 사람 모두 성인은 성인이나 대성인은 아니니, 대성인은 비명횡사(非命橫死)하지 않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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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23일에 상제님께서 재차 청주에 행행하시니 이는 검찰이 박한경 · 유철규 · 김영하 등을 기소하면서, 그 도의적인 책임이 상제님께도 있음을 인정하고 함께 기소하였으므로 26일에 개정되는 공판에 임어하시기 위함이며, 사건의 변호는 최병길(崔秉吉) 변호사에게 맡기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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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판의 재판장은 청주지방법원장인 문기선(文夔善)이 직접 담당하니, 그는 젊은 시절에 주역을 천독하여 신구학(新舊學)을 겸해서 수학하였다고 호언장담하며 자긍심과 아집이 강할뿐더러, 기독교 독신자로서 민족종교(民族宗敎)라면 사교(邪敎)로 보아 말살하려는 고집이 완강한 위인이니라. 그는 10여 년 전 백백교사건(白白敎事件)을 재판한 경력이 있어 이번에는 태극도를 말살할 강인한 의지로 임하니, 이날 공판에서도 개정벽두(開廷劈頭)부터 우선 상제님의 기백을 꺾으려고 "태극도는 혹세무민하는 사교가 아니오?" 하며 신문(訊問)하기 시작하니라. 상제님께서 "태극도는 천지의 대도요. 그대가 묻는 사교라는 용어가 도시 어느 법 어느 조문에 있는가를 알고 싶소." 하고 반문하시니 그는 흥분하며 "귀도(貴道)의 교리가 좋다 하여도 이를 빙자하여 '신도들의 금품을 수탈하고 재산을 탕진하게 하였다'하니 사교가 아니겠소?" 하고 힐문(詰問)하므로 "그것은 사실무근한 일로서 수사기록에도 명기되어 있으니 내가 굳이 답할 필요가 없노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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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이 다시 격앙된 어조로 "피고인은 도통하였다고 하는데 도통한 도사가 어찌 피고인이 되어 법정에 출석까지 하였소?" 하며, 자신이 가져온 주역을 펴서 그중 몇 구절의 해석을 요구하니라. 상제님께서 의연히 해석하여 주신 다음, "공자는 진채지액(陳蔡之厄)을 당하고 예수는 십자가의 혹형을 당하였다 하는데 성인군자일수록 천기를 거역하지 않는 법이니 범인이 감히 언설로 논할 수 있으리오? 더구나 그대가 주역까지 꺼내어 나의 도통 여부를 물었으나, 이는 인간의 문자로 운위(云謂)할 일이 아니며 이 법정의 일과는 관계가 없지 않소. 그대가 주역을 안다고 하나 팔괘생십이(八卦生十二)와 선기옥형(璿璣玉衡)의 이치를 아느뇨?" 하시니 그는 좌불안석하다가 차기 공판기일도 정하지 않은 채 폐정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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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1차 공판이 이와 같이 폐정되어 2차 기일이 미정일뿐더러, 한경 등의 공판 기간도 무한정 연장될 전망이므로 여관에 설석하시고 공부하시며, 최변호사로 하여금 보석을 신청하게 하셔서 5월 19일에 석방되게 하시니라. 그들이 출감 즉시 상제님께 배알하고 저희들의 잘못으로 욕급지존(辱及至尊)함이 황공무지하여 부복(俯伏)하고 사죄하니 상제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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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금현이 가물치회를 진상하니 상제님께서 진어하시며 "증산 상제님께서 이 회를 진어하시매 하늘에 가물치 형상이 나타났다 하는데 너희도 보아라." 하시고 문을 여시므로 우러러보니 과연 하늘에 가물치 형상의 구름이 떠 있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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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현이 상제님께 "후천에도 반상의 구별이 있나이까?" 하고 여쭈니 옆에 있던 정운교가 보다 못하여 "여기가 어느 존전이라고 당돌하게 그런 일을 여쭈느냐?" 하며 책망하니라. 상제님께서 운교에게 "관계없으니 그대로 두라." 하시며 금현에게 "후천에는 선천의 반상과는 다르나 그 한계는 더욱 명확하되 도통의 높고 낮음으로써 이루어지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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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에 상제님께서 부산도장으로 환어하시며, 박한경 등에게 하명하시기를 "너희들이 지방사업에 공로가 크고 또 이번에 고초도 많았으나 아무리 공(功)과 고(苦)가 많고 크더라도 그로써 죄가 소멸되지는 않는 법이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더욱 조심하라. 욕속(欲速)은 부달(不達)이고 과(過)는 불여불급(不如不及)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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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어느 날 임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각(覺)과 미(迷), 통(通)과 색(塞)은 초지(草紙) 한 장 사이니 허령(虛靈) · 허각(虛覺)에 빠질까 경계하되, 도통 또한 지나치게 탐내지 말라. 도통이 아닌 도색(道塞)에 빠질까 저어하노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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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도인 이건우(李建雨)가 해삼을 사서 상제님께 진상하니 맛있게 진어하시므로, 다음날도 또 진상하매 진어하지 않으시고 "너는 웬 돈이 그리 많아서 이런 값비싼 것을 매일 사 오느냐? 돈을 허비하지 말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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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에 제2차 공판기일이 지정되어 상제님께서 다시 청주로 행행하셔서 여관에 행재하시며 그 2층에 공부설석하시니라. 이때 늦더위가 기승하여 거둥하시기조차 곤란하셨으나 한시도 공부를 중단하지 않으시므로 시종한 청봉과 금현 등은 더욱 황공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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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공판도 도인들의 방청으로 법정이 초만원인데, 재판장은 전번의 미흡을 생각하여 더욱 준비한 듯 피고인에 대한 심리에 앞서, 또 주역을 가지고 나와 계사전(繫辭傳)의 귀신설(鬼神說) · 변화설(變化說)로부터 도덕론(道德論) · 길흉론(吉凶論) 등을 의기양양 집요하게 따져 물으니라. 상제님께서 "우주의 진리가 도요. 인간의 법이 또한 도인데 그 도주인 나에게 그런 진리와 법을 가지고 시험하려 하느뇨?" 하시며 그가 미처 묻지 못한 천지현기(天地玄機)와 인사규범(人事規範)의 모든 도리를 설파(說破)하시고, "나에게 위법이 있다면 그대가 재판장으로서 법에 따라 판결함이 당연한 소임이거늘 어찌 도를 거론하여 언책(言責)을 취하려 하느뇨?" 하시니라. 재판장이 그제야 몸을 가다듬고 "그러하시면 이 자리를 법정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선생이 제자를 가르치듯이 도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하므로 "그대가 굳이 도를 알고 싶으면 정식으로 나에게 예를 갖추고 배우도록 하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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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이 다시 검사와 변호사의 개별신문과 증거제출 등으로 공판을 진행하게 하니 검사가 "피고인은 남북한 관계를 수극화(水剋火)의 원리에 비유하여 '수(水)방인 북한이 화(火)방인 남한을 이긴다는 논리를 주장하였다' 하는데 사실이뇨?" 하고 신문하자 재판장이 "그러한 이론은 동양철학의 상식이니 논할 것이 못 되오." 하고 문답을 중지시키니라. 이때 도인 중에서 윤금현(尹金鉉) · 권오근(權五根) · 연동흠(延東欽) 등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증언하였는데 이날도 공판이 무기 연기된 채 폐정되므로 상제님께서는 다음날 도장으로 환행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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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8월 하순에 청주법원에서는 태극도 사건이 반년이 넘도록 종결되지 않은 채 그 재판장 문기선이 대전지법 원장으로 원장으로 전임되고, 부장판사 김동수(金東秀)가 담당하게 되었으나 공판은 그대로 연기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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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선은 이임 직후 폐백을 갖추어 부산도장으로 와서 상제님께 알현하고 전날의 무언함을 사죄하며 "정식으로 배우도록 하라 하신 하교에 따라 배알하오니 도리를 가르쳐 주옵소서." 하고 집지(執贄)하기를 간청하니라. 상제님께서 도리를 훈교하시니 감복하고 돌아간 후에 수차 와서 배알하고 봉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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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9일 상제님께서 구천 상제님 강세일 치성에 중부와 지방의 유공도인(有功道人)들을 참례시키시니, 도장이 협소하므로 중부의 일반 도인들은 그 시각에 각자의 집에서 도장을 향하여 배례하며 봉행하게 하시고, 음복은 빠짐없이 고루 나누도록 하시며 "음복은 상제님께서 내리시는 청복(淸福) · 성배(聖杯)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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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도인이 상제님께 여쭈기를 "우리 도와 도리가 세계 어느 종교나 철학사상(哲學思想)보다도 더 훌륭하오나 저는 우선 현실적으로 생업의 기반을 닦아 놓고 수도공부에 전념하려 하나이다." 하니 하교하시기를 "인간이 먹고산다는 일은 생명을 지탱하는 본능일뿐더러 또 인류의 문명이 그런 욕망으로 발전하기도 하느니라. 육체를 위하여 먹고살고 부모와 처자를 봉솔하는 생업에 충실함은 그것이 바로 생의 도리이며 직업의 신성성(神聖性)이니라.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탐(貪)이 되느니 명심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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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육체현실(肉體現實)과 심령이상(心靈理想)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음양의 도리니 육체만 위주하여 심령을 버리거나 이상만 앞세워 현실을 외면함도 음양합덕이 아니니 육체와 심령의 조절(調節)이 곧 합덕이니라. 돈을 벌기 위하여 공부를 버리면 그것은 금수의 일이요, 이상만 찾고 현실을 버리면 아표신(餓莩神)이 될 뿐이니 도는 합덕이라야 이루어지리라. 또 도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농사에도, 장사에도 있으니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심적기도(心的祈禱)와 아울러 도를 함께 닦아야 함이 합덕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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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에 상제님께서 규오, 중하 등을 거느리시고 양산 영취산 통도사(靈鷲山 通度寺)에 행행하셔서 경내를 순행하시고 환어하시니라. 절 문을 출어하실 때 한 개안승(開眼僧)이 보니 사내의 모든 불 · 보살이 상제님을 수종하여 떠나가므로 황급히 존전에 부복하고 사뢰기를 "저희 절에 녹(祿)줄이나 남겨 주고 가시옵소서." 하니 "나의 과차(過次)에 어찌 녹줄이 끊어지리오, 안심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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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상제님께서 내수들에게 이렇게 하교하시니라. "증산 상제님께서 정음정양(正陰正陽)을 설파(說破)하셨거니와 태극에서도 음을 양에 앞서 말하느니라. 그러므로 인류를 위시한 만유군생의 모태(母胎)가 음이며 여성이니 생명의 바탕이 실로 정음의 자리니라. 무극이 태극으로 기동함에 선음 · 후양(先陰 後陽)으로 합덕함을 알면 천하만사가 먼저 여성의 덕에 기인함도 알리라. 내수들은 도를 위하여 분발하라. 도의 기동, 생명력이 그대들에게 있느니 도자(道子) · 도손(道孫)을 낳고 기르는 포덕 · 합덕의 명(命)과 임(任)을 다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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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청소년 · 아동들에게 하교하시기를 "너희들은 마음이 때 묻지 않은 백지장과 같으니 거기에 좋은 그림이나 바른 글씨를 기록하여야 하느니라. 그런 생각으로 마음 닦는 공부를 할지어다." 하시니라.